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의 맏형 구본길은 7월 3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린 캐나다와 2024 파리 올림픽 단체전 8강 도중 선수 교체를 생각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도경동이 교체 멤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구본길은 "그때 (도)경동이가 형을 믿는다, 형 뛰라고 괜찮다고, 자기가 뒤에 있으니까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경기에 나설 기회를 마다하는 선수는 보기 드물다. 보통 믿음이 아니다.
구본길은 8강전 이후 대표팀 내 분위기를 전했다. 구본길은 "라커룸에 가서 10살 차이 나는 후배한테 혼났다. 형은 왜 자신감이 없냐고, 형은 자신있게 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조금 화를 내더라"며 웃었다.
도경동은 맞는 말을 했다. 그래도 위계 질서가 뚜렷한 운동 후배가 하늘 같은 선배에게 강한 어조로 말을 건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구본길은 달랐다. 한국 펜싱은 달랐다. 후배의 말에 딱히 반박할 게 없었던 구본길은 "저는 그때 많이 약해져 있었다"고 인정했다.
구본길은 도경동에게 "어 그래, 맞아. 경동아. 내가 지금 약해. 내가 조금 더 자신있게 해볼게. 진짜 한번 해볼게. 근데 경동아. 왜 화를 내?"라고 말하며 분위기를 풀어줬다.
그러자 도경동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선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거라고 설명했다. 구본길도 후배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4강전부터 제 경기력이 올라왔고 결승전도 자신 있었다"고 말했다.
도경동은 결승전의 히든카드로 준비된 선수였다. 구본길의 교체 선수로 들어가 승부처에서 연속 5점을 뽑아내며 단체전 우승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구본길은 "만약 8강전에 교체를 했다면 우리가 한 번도 훈련을 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경동이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심리적으로 압박이 됐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우리가 훈련한 시나리오대로 됐다"고 말했다.
도경동은 선배들의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했다. "제가 경기에 들어갈 때 형들이 불안해하지 않는 모습을 저에게 보여줬다. 저도 질 자신이 없어서 들어가기 전에 제가 이기고 올 테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그 말을 지켜 다행"이라며 웃었다.
'뉴 어펜져스'로 불리는 대표팀은 메달 시상식에서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선수 4명이 일렬로 서서 나란히 어깨 동무를 한 채 동시에 시상대 가장 높은 곳을 밟았다.
오상욱은 "우리 함께 그렇게 시상대에 올라가자고 얘기했다. 펜싱 앞에서 우리는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선배라고 '너희는 이렇게 해'라고 하지 않는다. 펜싱을 잘하면 후배가 형이 될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펜싱만 잘하면 '형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남자 사브르 대표팀이 12년 동안 어떻게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수평적인 관계, 가족 같은 친밀함 그리고 펜싱에 대한 진심. 대표팀 선수들은 외모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너무 훈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