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볼래]'지식혁명' 구텐베르크 인쇄술…78년 앞선 '직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50년 만에 공개한 '직지 하권'. 연합뉴스

인류의 스포츠 제전 올림픽이 파리에서 26일 개막한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파리시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린다. 파리시에서 약 500㎞ 떨어진 옛 신성로마제국의 땅이자 서 라인강을 끼고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7대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네스코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4월 23일)을 기념해 매년 선정하는 '2024 세계 책의 수도(World Book Capital)'이기도 하다.

'세계 책의 수도'로 지정된 도시들은 국경을 넘어 모든 연령과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책과 독서를 장려하고 그 해의 활동 프로그램을 조직한다. 2001년 마드리드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24개 도시가 선정됐고, 한국은 2015년 인천이 선정된 바 있다.

스트라스부르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인쇄기 발명으로 인류 역사와 문명의 혁명적 전환기를 가져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다.

1397년(또는 1398년) 신성로마제국(독일) 마인츠의 하급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구텐베르크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화폐주조와 세공업자로 일하던 중 귀족과 길드 세력의 갈등으로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해 여러 사업을 전전하며 인쇄업에도 뛰어든다. 그러나 여전히 필사가 일반적이어서 대중화 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의 초기 인쇄 기술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화폐주조와 금속세공 기술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48년 마인츠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새로운 금속활판 기술로 인쇄소를 개업했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유럽 문명의 대전환을 그의 인쇄 기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처음 인쇄한 것은 소규모의 라틴어 교재나 종교적인 문서가 대부분이었는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것은 카톨릭 교회의 '면죄부' 대량 인쇄였다. 서기가 필사하는 것보다 빨랐고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고급스러운 장식이 더해지는 등 품질도 뛰어났다. '대박'을 치며 부를 축적했던 그는 성경을 본격적으로 인쇄 출판(구텐베르크 42행 성경)하지만 여러 소송에 휘말리며 인쇄기까지 몰수당하는 등 1468년 세상을 등지기까지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광장에 설치된 구텐베르크 석상. Pixabay 갈무리

독일 마인츠에 텐베르크 박물관이 있지만 스트라스부르에도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과 기념 석상이 있다. 1430년대와 1440년대에 스트라스부르에 살면서 혁신적인 인쇄기에 대한 초기 설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0년대 초 스트라스부르에서 유학했던 고전주의 작가이자 철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구텐베르크의 석상을 보고는 뛰어난 고딕 양식의 디자인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 석상은 수염을 기르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텐베르크가 "Et la lumiere fut"(그리고 빛이 있었다)라는 창세기 구절이 활자로 찍힌 종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인쇄소는 면죄부를 찍어냈고 역설적으로 이를 비판한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인쇄해 배포했다.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과 지식과 정보의 보급 혁명이 일어났고 상공업의 발달은 인쇄술 전파의 뒷받침이 됐다.

구텐베르크의 흔적이 남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보자.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BnF)은 지난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 서적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의 원본을 50년 만에 대중에 공개했다.

지난해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회를 위해 도서관 희귀 도서 수장고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직지를 다시 꺼낸 것이다. 1973년 '동양의 보물'전 이후 50년 만이다. 직지는 전시 첫 부분인 '구텐베르크 이전의 인쇄술' 부분에 나온 전시품 10여 점 중 하나로,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비이원성'을 이야기하는 장을 펼쳐놨다.

직지는 고려 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 흥덕사(興德寺)에서 만들어진 불교 인쇄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년 간행됐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직지는 19세기 말에 주한프랑스공사였던 꼴랭 드 플랑시가 조선에서 수집한 여러 유물 중 하나로, 프랑스로 가져가 1900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때 한국관에 처음 전시하면서 알려졌다. 그는 경매로 여러 고서와 물품을 내놓았는데, 직지에 대해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그의 경이로운 발명을 주기 훨씬 전에 한국이 금속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경매품 가운데 대부분의 고서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구입하였지만 직지는 1911년 골동품상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한 뒤 수집한 물품들과 함께 지하 비밀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1943년 병으로 미국에서 세상을 뜨면서 직지와 육조법보단경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직지는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상속자인 마탱이 1950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등록 번호는 '한국 책 109번(COREEN 109)'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 문화재청 제공

청고인쇄박물관이 전통기법으로 복원한 직지 활자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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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된 박병선 박사가 스승 이병도의 당부에 따라 구한말 프랑스에 의해 도난당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직지를 발견해 1972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임을 입증하면서 국내외 연구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구텐베르크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직지를 함께 공개했다. 직지의 존재가 확인되기 전까지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혁명적 존재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었고 성경 출판이었지만 현존하는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의 존재감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실크로드'처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져 구텐베르크와 어떤 연결성을 가졌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른바 '직지로드'(활자로드) 설이다. 현재까지 이를 증명할 기록이나 증거는 부재한 상황이다.

로랑스 앙젤 국립도서관장은 직지 공개 이유에 대해 "인쇄기술의 발전은 구텐베르크 같은 한 사람의 기술에 의해서가 아닌, 역사적 흐름 안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며 "그런 관점에서 구텐베르크 성경에 앞서 한국에서 직지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회장의 안내문에는 "당시 아시아의 인쇄 기술은 유럽보다 앞섰으나, 이 기술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됐음을 증명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아시아와 유럽의 인쇄 기술은 서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이미 2021년 청주 직지 국제포럼에서 강조된 내용이다.

당시 포럼에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한국 금속활자의 모방인가?'라는 주제 발표를 한 폴커 베나트 바겐호프 구텐베르크 박물관 기술분야 큐레이터는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유럽으로 전수됐다는 역사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크로드가 '활자로드' 구실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결정적 증거를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기술 혁신은 한국 등 아시아 어느 지역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을 수 없는 독자적 업적이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의 활자 체계를 모방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올리비에 드로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교수는 "한국의 활판 인쇄술이 직·간접적으로 서양에 전달됐다는 설득력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없다. 다만 기술의 확산보다 아이디어·영향력의 확산이라는 문화적 전파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동서양 금속활자 인쇄술의 비교 연구'에서 "세계 인쇄문화사에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국과 독일 구텐베르크 사이에 금속활자 인쇄에 관한 정보가 교환됐을 수도 있다. 실크로드를 통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양 전파를 일컫는 '활자로드'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지만 이후 사실상 동양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양 전파 가능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쌤앤파커스 제공

반크 갈무리

역사 추리소설가인 김진명 작가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직지의 진실 공방을 다룬 장편소설 '직지: 아모르 마네트'(2019 쌤앤파커스)는 직지의 발견 이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조명받지 못한 '직지로드' '활자로드'에 대한 관심을 일반 대중으로 확산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설 '직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금속활자의 비밀들·18회 전주영화제) 제작팀이 동양의 금속활자가 유럽으로 흘러간 흔적을 찾던 중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요한 22세 교황이 고려 충숙왕에 보낸 서한의 필사본 존재를 확인했다는 단서를 소재로 고려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 연결성을 찾으려는 이들과 이를 숨기려는 거대한 세력을 추적해 나가는 추리소설이다.

국내외 역사학자들의 말대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유럽에 전파됐다는 명확한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직지 기록대로' 동양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사용했지만 구텐베르크로 대표되는 서양의 독자적인 인쇄기술 발명이 있었다는 서구 학자들의 방점도 여전하다.  

다만 여지는 열려있다. 필사에서 목판을 건너 뛰고 곧바로 금속활자 인쇄로 넘어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제조방식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문화적 교류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는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됐다는 이른바 '금속활자 로드'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포스터를 제작해 소셜미디어(SNS)에 배포한 바 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뉴욕타임스 기사, 존 홉슨 영국 셰필드대 교수, 영국의 역사학자 헨리 허드슨 등이 '직지가 유럽으로 전파됐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4장의 포스터에 담았다.

오는 9월 청주고인쇄박물관 일원에서 개최되는 '2024 직지문화축제'에는 구텐베르크박물관이 참여하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 전시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고 한다. 지식의 대중화와 지식 산업의 발전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우리나라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발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셰필드대학 존 홉슨 교수는 과거 국내 다큐멘터리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보다 많은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를 연구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한국에서 얻은 것이 맞는지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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