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汚辱)의 역사라고 했습니다만, 참 치가 떨리고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여든이 넘은 안동일 변호사가 44년 전 변호했던 한 피고인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안 변호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고(故)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국선변호사였습니다.
사상 초유 대통령이 살해된 사건,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살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이 사건의 피고인,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당한 김 전 부장에 대한 재심 여부를 고심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세 번의 재판이 열렸고, 안 변호사가 당시 재판을 모두 기억하는, 유일한 증인으로 두 차례 법정에 섰습니다.
오늘의 '법정B컷'은 수십 년이 지나 재판정에서 재생된 김 전 부장의 최후 진술과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이 숨소리도 죽여 가며 집중했던 한 변호인의 증언이 교차했던 '그날'의 편린을 따라가 봅니다.
대학 시절 배운 '절차적 정의'가 무너진 '개판' 재판
이 재판은 김 전 부장의 유족들이 40년 만인 지난 2020년 재심을 청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유족은 그의 행위가 '대통령이 되기 위한' 내란목적의 살인은 아니었고, 피고인의 방어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초고속 재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부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1심 재판은 시작된 지 단 16일 만에 끝났습니다. 교수형 집행은 대법원 선고 단 나흘 뒤인 1980년 5월 24일 이뤄졌고요.
안 변호사는 대통령 살해 사건이라는 국가적 중대 사건의 재판 절차가 무너졌다고 힘줘 말했습니다. 그는 재심 청구 사건의 재판 말미에 10·26 재판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240712 '김재규 재심 청구 사건' 마지막 심문 기일 中 |
변호사: 10·26 재판을 두고 사법부 오욕의 역사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사건 40년 넘게 이 사건 관련해서 소회를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안동일 변호사(증인): 제가 증인으로 와서 증언 하는 소회를 얘기해달라고요? (재판장을 바라보며) 조금 얘기해도 될까요. 재판장: 하시죠. 안동일 변호사: 김재규 피고인의 변호를 일곱 분이 했습니다. 제가 막내였는데 저만 생존해 있고 나머지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유일한 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는데, 감개가 깊습니다" 제가 10·26 사건을 얘기할 때마다 당시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고 막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 그렇게 막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44년 45년 전에 일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법부 환경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은 (잠시 침묵) 오욕의 역사라고 했습니다만, 치가 떨리고 참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
그는 대학 시절 처음 법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리며, 김 전 부장과 함께 기소된 당시 재판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잃었다고 꼬집었습니다.
240712 '김재규 재심 청구 사건' 마지막 심문 기일 中 |
안동일 변호사: 제가 대학에 들어가 <법학 개론>을 배울 때 처음 배운 것이 '절차적 정의'였습니다. 아무리 목적과 목표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이르는 과정, 절차와 수단이 옳지 않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당시 재판은 이런 절차적 정의가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것은 당시 아무리 군법 회의라고 하더라도 '사법부'입니다. 옆방에는 차출돼 나온 검사, 판사 십여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계속 재판 지켜보면서 지도하고 '코치'했습니다. 심지어 쪽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랬을 때 거기 나와 있던 검사, 판사 중 "이렇게 재판하는 건 아니다", "이런 절차는 없다" 항변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중략) 사법부의 요체는 사법권의 독립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원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라고 헌법에 쓰여 있습니다. 당시 군법 회의가 과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목소리 커짐) 재판했는가,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우리나라 지성, 지식인 공직자가 … (침묵)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을 해줬다면 절차적 정의가 무너지고 그거에 의해서 신군부가 집권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통한으로 여기는 겁니다. 말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당시 변호인은 민간인인 김재규의 재판을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아닌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이관해달라며 재정신청을 냈지만,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재판부에 전달된 '쪽지'…그 후엔 "그만하라"
그는 "권력이 쥐여준 시간표에 따라 재판이 진행됐다"며 전두환 신군부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나의 예로 '쪽지 재판'을 들었죠. 재판 중간에 판사가 앉은 법대 뒤쪽 문으로 누군가 들어와 법무사에게 쪽지를 전하고 나가는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법무사는 현재 군판사를 말합니다.
240612 '김재규 재심 청구' 사건 2차 심문 기일 中 |
변호사: 재판 기록 메모했다는데, 쪽지가 전달되면 재판부가 달라졌습니까. 안 변호사: 아유, 그럼요 쪽지가 날아오면 잠시 휴정하기도 하고 예컨대 재판 진행을 말하자면 제지 한다든지,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변호사: 쪽지가 전달된 것은 이 법정을 놓고 가정한다면, 오른쪽에 문이 있었나요? 안 변호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른쪽 문이었던 걸로 던 걸로 기억합니다. (중략) 휴정하는 동안 국선 변호사 오라고 해서 (법무관) 집무실에 갔더니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안개가 담배 연기 자욱한 방이었는데…(중략) 법무관 바로 옆자리에 있는데 한 남자분이 "국선 변호사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해"라고 질문을 해서 "아니, 열심히 하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 손 좀 봐야겠어"라고… (방청석에서 탄식) 이게 좀 험악하구나 했는데 몇 마디 오고 가는데 "속개합니다"라는 법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를 밀면서 법정에 들어가라고 해서 나왔죠. 마이크로 듣고 여기서 모니터링 해가지고 지시 사항을 적은 쪽지를 보내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안 변호사는 법무관 집무실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재판 내용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듣고, 지시 사항을 적어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공방이 거세질수록 쪽지 전달 횟수는 늘었고요.
재심 청구 법정에서 공개된 아래 녹취록이 바로 그 순간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240612 '김재규 재심 청구' 사건 2차 심문 기일 中 |
변호사: 당시 재판 과정의 '험악성'이라고 할까요, 재판부에서 피고인 변론이나 진술 제지하는 대목입니다. [1979년 1심 군법회의 2차 공판 기일 녹취록 재생] 김재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신 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도 이해가 안 갑니다. 민주주의 핵심은 민주, 민권, 자유, 평등입니다. 그리고 삼권 분립이라는 게 특징입니다. 결국 한국이나 서구의 어떤 나라든 간에 민주주의가 둘일 수 없습니다. 한국이라고 해서… 검찰관: 본 법정이 무슨 어떤 헌법학 강의장이 아니고, 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신문은 제한해 주십시오. 김재규: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제가 볼 때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성립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신헌법을 볼 때… 법무사: (격앙된 어조로) 제한하겠습니다. 그만하십시오. 김재규: 유신헌법이라 하는 것은… 법무사: (큰소리로) 법정 질서에 도전하는 겁니까! 변호사: 이 사건의 동기를 말씀하는데 이를 제한하면 이 사건이. 법무사: 동기를 간단히 말씀하십시오. 자꾸 역사, 역사하지 마십시오. [녹취록 재생 끝] 변호사: 여기서 제한됐습니다. 법정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이가 재판장입니다. 안동일 변호사: 기억납니다. 계속 저렇게 제한하고…목소리를 들으니까 저 법무사가 돌아가셨는데 아마 쪽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렇게 험하게 제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김재규' 재심할까…이르면 8월 결정
안 변호사는 1심 재판 중간에 12·12 사태가 벌어져 뜻하지 않게 재판이 하루 연기된 걸 제외하고는 매일 이어지는 야간 재판에 공판 조서의 열람 등사는커녕 피고인 방어권도 망가졌다고 했습니다.
훗날 본 공판조서는 법정 진술과는 딴판이었다고요. (1, 2차 기일 사이 대법원 재정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3일을 제외하고는 재판 시계는 숨 가쁘게 흘렀습니다.)
훗날 본 공판조서는 법정 진술과는 딴판이었다고요. (1, 2차 기일 사이 대법원 재정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3일을 제외하고는 재판 시계는 숨 가쁘게 흘렀습니다.)
언론 보도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김 전 부장의 최후 진술 역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10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법정에서도 카랑한 김 전 부장의 목소리가 세월이 실린 듯한 음질에 섞여 흘러나왔습니다.
240712 김재규 재심 청구 사건 마지막 심문 기일 中 |
1979년 김재규 1심 최후진술 김재규: 10월 유신 체제는 국민을 위한 체제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과 종신 대통령 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가 돼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를 지킬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이를 말살할 권한은 누구로부터 받을 수도 절대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10·26 혁명의 목적을 말하면 첫째가 자유민주주의 회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중략) 제가 한마디 확실히 해둘 것은 결코 저는 결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군인이었고 혁명가입니다. |
녹취록을 근거로 김 전 부장의 대통령 살해 동기 부분이 그동안 왜곡됐다고 했습니다. 당시 김 전 부장이 대통령이 되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에 이르게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속전속결로 결판 난 재판이지만, 당시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원 판사 14명 가운데 6명은 '소수 의견'을 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안 변호사는 이들이 서빙고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내내 꼿꼿하게 증언을 이어가던 안 변호사는 재판이 끝나자 천천히 증인석에서 일어났습니다. 푸른빛 여름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뒤돌아 나오는 모습에서 '그날'에 대한 기억과 증언은 법정에 남겨둔 듯 보였습니다. 이제 사법부의 결정만이 남았습니다. 이르면 오는 8월 재심 여부가 판가름 납니다.
유족은 재심을 청구하며 "10·26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라기보다는 '역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