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나선 한동훈 후보가 예기치 못한 부메랑을 맞았다. 한 후보가 지난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나경원 후보에게 "패스트트랙 관련 공소를 취소해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던 폭로가 현역의원들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서다.
지역과 계파 관계없이 한 후보의 돌발 언행에 당 안팎의 당혹감이 퍼지는 가운데 19일부터 시작되는 모바일 투표에 악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한 후보 역시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18일 사과했지만, 이미 당내에서는 법무부장관 시절부터 보여온 '싸움닭' 스타일의 리더십으로는 '심리적 분당 상태'를 극복하고 화합을 이루기 어렵다는 우려가 더욱 증폭된 상황이다.
하루 만에 사과한 韓…'싸움닭' 스타일에 벌써 피로감
한 후보의 돌발 발언은 나 후보가 "법무부장관으로서 이재명 대표를 구속 기소하겠다고 했는데, 체포영장이 기각됐다. 기본적인 본인의 책무를 알지 못하고 일을 한 것 아닌가"라며 "외화뇌빈(外華內貧, 겉은 화려하나 속은 텅 비어 있음)이라는 말이 딱 맞다"는 비판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나 후보는 줄곧 이 대표에 대한 영장이 기각된 데 대해 한 후보에게 책임을 물어왔다. 이에 한 후보는 '법무부장관의 소관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반박했지만, 돌연 나 대표를 향해 "저에게 본인의 패스트트랙 사건 공소를 취소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 있지 않느냐"고 따진 것.
2019년 4월 선거제 개편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과정에서 당시 자유한국당(現 국민의힘 전신) 소속 일부 의원들과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 의안과를 점거하며 몸싸움을 벌인 바 있다. 이들 의원들 중 37명은 결국 기소됐고 이듬해 1월부터 서울남부지법에서 재판받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255조는 "공소는 제1심판결의 선고 전까지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한 후보의 폭로에 나 후보는 물론 원희룡 후보까지 곧바로 반발했다. 나 후보는 "우리 당 대표 후보가 맞나. 보수정권의 후보가 맞나"라며 "이기적이고 불안하다. 민주당의 의회폭거에 눈 뜨고 당해야 되겠나"라고 재반박에 나섰다.
파장은 이날 크게 불거졌다. 2019년 당시 현장에 있던 김태흠 충남도지사를 필두로, 소속 의원들의 단체 텔레그램방에서 "앞으로 누가 당을 위해 앞장서겠냐"는 성토가 쏟아졌다. 윤한홍 의원의 글에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공감을 표했고, 한 후보가 총선 국면 직접 영입에 나섰던 고동진 의원까지 나서자 한 후보 측은 결국 "신중하지 못했던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한 후보는 또 "당대표가 되면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 재판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강화하고, 여야의 대승적 재발방지 약속 및 상호 처벌불원 방안도 검토, 추진하겠다"며 "당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용기 내어 싸웠던 분들의 피해가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달래기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한 후보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그러나 패스트트랙 사건으로 현재까지 재판을 받고 있는 의원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과가 잘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다.
이날 KBS에서 열린 TV 토론회에서 이른바 '패트 폭로'에 대한 집중 추궁이 이어졌다. 나 후보는 "헌법 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요청을 개인적 청탁인 것처럼 온 천하에 알리는 자세를 가진 분이 당 대표는커녕 당원으로서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한 후보가 대표가 되면 누가 의회 민주주의 폭거에 나가 싸우겠나"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한 후보는 "일반 국민들은 그렇게 개인적인 사건, 본인이 직접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박은 오히려 더 큰 반발을 샀다. 나 후보는 "개인적 사건이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제가 저를 (공소 취소)해달라고 그런 것인가. 우리 27명이 기소됐다"며 "개인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사과의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개인적 사건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분노한다"고 따졌다.
그러자 한 후보는 "개인적 사건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잡겠다. 비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날 TV토론에 앞서 한 차례 사과했지만, 결국 또 다시 궁지에 몰렸다.
당 안팎에서는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크게 보고 있다. 한 후보는 "당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며 사과했지만, 정작 다시 토론회에서 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 후보가 당시 한국당 의원들이 며칠 동안 스크럼을 짜면서까지 민주당의 공수처법 발의를 막으려고 했던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라는 것을 간과한 데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초선의원은 "문자 (읽씹) 파동의 근원은 계파 갈등에 있었다면 '패스트트랙 발언'은 의원직과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며 "한 후보의 명백한 실수였다"라고 진단했다. 당시 기소된 한국당 소속 의원들(강효상, 민경욱, 김정재, 송언석, 이은재, 이만희, 윤한홍, 김명연, 정갑윤, 정양석, 정용기, 정태옥, 곽상도, 김선동, 김성태, 김태흠, 박성중, 윤상직, 이장우, 이철규, 장제원, 홍철호 등) 중 대부분은 현역의원이 아니지만 의원들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문자 파동 때보다 오히려 더 발끈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한 후보의 '싸움닭' 스타일에 대한 피로감도 서서히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번 파장을 키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어대한' 분위기 속에서 그다지 수세에 몰리지도 않았는데 왜 동료 의원들의 급소를 찌르냐는 것이다.
또 다른 초선의원은 "누구든 습관을 고치긴 어려운 법"이라며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야당 의원들과 싸울 때에는 도움이 됐지만, 당내 경선에서는 독이 됐다"며 에둘러 비판했다.
"탈당" "윤리위 제소" 도배된 당원게시판…친윤 조직표 막판 위력?
당원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전날 당원 게시판에는 한 후보를 향해 "탈당하라", "윤리위에 제소하라"는 격앙된 글들이 무더기로 올라오기도 했다."해당 행위를 넘어선 공무상 누설", "우리 당의 대표로는 부적절하다", "패스트트랙 악법을 통과시키려는 민주당에 맞선 국민의힘 당원과 당직자들을 농락했다", "윤 대통령과의 관계도 자기 유·불리에 따라 터트리지 않겠느냐"는 등의 과격한 발언이 주를 이뤘다.
이 같은 반응에 대해 당내에선 상반된 해석이 나온다. 이날부터 시작되는 모바일 투표를 앞두고 "친윤계가 막판 결집에 나선 것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반면, "중도층도 한 후보가 내부 총질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다만 친윤계 영남 조직표의 파급력을 놓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친윤계 핵심 의원들이 조직표 동원에 나선 만큼 결선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관측과 이미 한 후보에 돌아선 밑바닥 당심을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라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영남권 한 초선의원은 "영남 당원들 입장에서 윤 대통령과 한 후보 모두 '외부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듯 끈끈한 관계가 아니다"라며 "정부 실책이 잇따라 나오니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한 후보를 좀 지켜보자'는 쪽으로 굳어진 상태"라고 분석했다.
당원 선거인단 투표는 19일부터 20일까지 모바일, 21일부터 22일까지 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진행된다. 오는 21일과 22일에는 일반 국민 여론조사가 실시된다.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는 당원투표 80%, 일반 국민여론조사 20%를 합산한 결과를 토대로 선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