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EN:]'멜라닌' 하승민 작가 "차별과 혐오에 맞설 '횡적 연대' 절실하다"

2024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멜라닌' 출간
"차기작 SF와 국가권력 다룬 이야기 구상 중"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하승민 작가가 18일 수상작 '멜라닌' 출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민수 기자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장편소설 '멜라닌'은 이처럼 주인공의 처지를 규정하며 첫 문장을 시작한다.

한국 사회에서 뿌리 깊은 차별의 언어는 조선조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 간 수백만 명의 포로들 중 가족들이 어렵게 마련한 돈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일컫는 '환향녀'다.

정사(正史)의 기록에는 없으나 당시 전후 사회에 만연했던, 철저한 계급사회인 조선의 다양한 기록에서 순결과 정조를 잃은 출산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음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고대와 근대, 현대를 막론하고 민족과 민족이 부딪히는 격변기에 특히 이 같은 차별과 멸시, 폭력이 다양한 양상으로 확인된다.

소설 '멜라닌'은 파란 피부로 태어난 한국-베트남 혼혈 소년이 주인공이다. 이웃들의 멸시와 차별을 당하던 중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지만 유색인종 중에서도 더 낮은 계급으로 취급받는다. 학교 친구와 선생님, 이웃들에게 일상적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 과정이 9·11테러, 총기 난사 사건, 한국 대통령 탄핵 등의 역사적 사건들과 촘촘하게 맞물리며 펼쳐진다.

'멜라닌'으로 제29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하승민 작가는 1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주인공이 파란 피부로 태어났다는 설정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폭력의 양태를 나타내는 소설적 장치"라고 말했다.

주인공 재일은 어린 시절부터 파란 피부 탓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은근한 냉대와 이웃들의 노골적인 멸시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따라 떠난 미국 소수자들의 이민 사회 안팎에서 자신을 아끼고 보살펴주던 가까운 사람들이 잇따라 죽거나 떠나는 상실을 경험한다. 그러나 끝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소년의 분투가 빛을 발한다.

한겨레출판 제공

하 작가는 '파란 피부'를 주요 설정으로 한 데는 "파란 피부인 사람은 일부 약물 부작용을 제외하면 유전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특정 소수집단에 관한 작품을 쓰기보다 광범위한 차별과 배척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면서 "이미 존재하는 피부색이 되면 그 소수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 존재하지 않는 파란 피부색을 알레고리고 활용했다"고 말했다.

실제 '하얀 흑인'으로 불리는 알비노(ALBINO)는 멜라닌 색소를 합성하지 못해 생기는 선천성 희귀 유전질환이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민간신앙인 부두(Voodoo)에서는 그 신체를 영험하게 여기거나 또 다른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 작가의 경험이나 환경적 배경이 이 소설의 테마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굴지의 IT와 금융 기업에서 시장분석과 금융 서비스 개발자로 10년 넘게 일한 직장인이었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축에 드는 그였지만 밤낮 없는 격무와 쳇바퀴 돌 듯하는 직장생활에서 얻은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습작을 즐겼던 소설쓰기로 탈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업 작가로 나선 것은 2020년부터다. 첫 장편소설 '콘크리트'를 출간했다. '콘크리트'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등 장르소설도 여러 권 펴냈다.

하 작가는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재해를 접하면서 계급주의와 파시즘 문제에 대해 오래 전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단순히 사회비판적 소재의 글을 쓰는 것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쓰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으로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하승민 작가가 18일 수상작 '멜라닌' 출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

그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취재로 작품 설정의 현실성을 높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했다.

하 작가는 "한국에 온 미국 남부 미시시피 출신 노부부와 일주일간 동행하며 미국의 차별에 관한 인터뷰를 했고, 미국에서 중고교를 다닌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했다"며 "다양한 참고도서와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소설의 배경에 녹여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고 말하는 하 작가의 첨예한 문제 의식과 차별과 혐오, 불평등의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멜라닌'은 심사위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심사위원인 소설가 김금희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세공하다가도 불현듯 꿈처럼 환상적이고 애틋해지는 장으로 우리를 데려다놓는다"고 평가했고, 편혜영 소설가는 "'멜라닌'을 통해 한국 소설은 차별과 혐오를 가리키는 인상적인 또 하나의 고유명사를 갖게 되었다"고 상찬했다.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하승민 작가가 18일 수상작 '멜라닌'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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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작가는 차별과 계급화의 고착화를 깨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국가와 성별 등 태생적으로 부여된 종의 연대에서 탈피해 횡으로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성별, 세대, 인종, 국가, 종교로 분류된 인간은 연대가 필요한 집단과 분리됨으로써 고립된다. 군림하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도구로 작동한다. 이것이 종으로 연대한 결과다. 종으로의 연대는 차별과 계급화를 심화시킨다. 계급화된 상태로 분열하고 고착화된다. 이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수직 결합을 벗어나야 한다. 수평적 구심점을 확보해야 한다. 평행한 타인과 연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종이 아닌 횡으로의 연대다. 횡적 연대다. 집단에 맞서는 집단이며 구조를 전복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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