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안판석 감독님 작업 스타일과 잘 어울릴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스타일로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 가시길래 배우들 후기가 좋은지 기대를 하게 되잖아요. 제가 일기를 쓴 지 얼마 안됐는데 거기에 같이 일하고 싶은 작가님, 감독님 이야기도 있거든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안판석 감독님 차기작이라고 대본이 온 거예요. 매니저가 일단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냥 안 읽고 결정했죠. 내가 준비되어있으면 잘 해내겠다, 운명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대본을 봤는데 너무 전문적이어서 작가님이 학원 강사 출신이신 줄 알았어요. 멜로 아닌 멜로의 부분이 있어서 천천히 빌드업 하려나 기대도 많이 됐고요. 그런데 역시 대사가 많은 게 제 운명이었나 봐요."
막상 현장에서 정려원과 안판석 PD의 스타일은 달랐다. 철저한 스타일인 정려원은 영어가 아닌 국어 강사 서혜진 역을 맡았기 때문에 열심히 현강을 들으러 다니고, 시연 강의를 애드리브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소화하는 어마어마한 공부량을 보며 놀라기도 했다.
"영어 강사 역할이 아니라 국어 강사라고 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어요. 그나마 어린 시절 호주로 갔을 때, 한국말 잊어버릴까봐 어머니가 무조건 책을 읽히셔서 그걸로 잘 비벼 보겠다 다짐 했던 거 같아요. (웃음) 그런데 다른 배우들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까 저만 너무 뒤에서 출발한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인강(인터넷 강의)과 현강(현장 강의), 수시와 정시도 몰랐죠. 적절하지 않은 배우가 역할을 맡았다는 질타를 받을까 두려움이 있었어요. 연습이 최고의 살 길이라고 연습밖에 안한 거 같은데 감독님은 연습 많이 하는 스타일을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강의 장면 리허설에서 애드립을 다 준비했는데 빼고 보자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제 베스트가 아니라고 해도 '아니야. 리얼했어' 이러고 가시더라고요. 2분 넘게 촬영했는데 40초만 나왔다니까요. (웃음) 베드씬도 배우들끼리 합을 짰지만 그렇게 안 가셔서 처음에는 까만 화면만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방송 보니까 너무 야한 거예요. 로맨스 장면도 조명 예쁘게 다는 게 아니라 난로 하나로 가신다고 했거든요. '익숙한 공간이 어떤 계기로 확 낯설어지는 게 사랑이 찾아 오는 것과 같다. 그걸 이해 못하면 안돼'라고 하셨어요. 딱 그 장면이 이들의 연애를 설득시키더라고요."
이 같은 방식은 계산된 연습보다는 날 것의 치열한 고민으로 배우에게 정답을 찾아가게 했다. 정려원도 연기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이지만 안판석 PD와의 작업으로 또 한 번 성장을 이뤄냈다. 솔직한 이야기들에서 안판석 PD를 향한 정려원의 신뢰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감독님은 더하는 것보단 빼는 걸 좋아하세요. 너무 연습을 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 가득한 얼굴이나 경직된 게 감독님은 보이시나봐요. 대사도 외우기보다는 현장에서 치는 걸 선호하시더라고요. 제가 자신 있었던 두 장면이 있는데 딱 그 장면들이 결국 안 나갔어요. 정말 귀신 같아요. 어떤 경지에 이른 도사 같기도 하고요. 제가 답을 못 찾은 상태에서 스스로 찾아 나가게 하시니까 배운 게 많아요. 물론 장난으로 '감독님은 애초에 쌩얼(화장 안한 얼굴)도 완전 예쁘고 머리털도 잘나고, 키도 적당하고, 안 외웠는데도 대사를 바로 치는 천재를 만나야 돼요'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웃음)"
"혜진이는 본질적인 게 충당되지 않아서 마음에 구멍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미결'인 존재 같았거든요. 그 구멍을 준호(위하준)가 와서 한번에 꽉 막은 거죠. 혜진이에게 필요했던 건 힘들 때 함께 밥 먹어주고, 일상을 지키는 거였거든요. 사람이 무너져갈 때 그런 게 진짜 사랑이란 걸 작가님이 아셨던 거예요. '작가님은 찐(진짜)'이라고 생각했죠. 답답할 수 있어도 시청자들이 그 마음을 많이 알아주길 바랐어요. 멜로 한 지가 오래돼서 서로 좀 뚝딱 거리기도 했는데 애초에 감독님은 혜진이가 '모솔'(모태 솔로)이라고 생각하셨더라고요. 35살까지 가족 부양하고 정글 같은 대치동에서 살아 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을 테니까요."
사제지간 로맨스의 표현은 쉽지 않은 지점이었다. 나이 차이를 떠나 스승과 제자 관계가 줄 수 있는 불편함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공교육과 사교육의 대치를 드러내는 장면에서도 후폭풍이 뒤따랐다. 음주운전 장면 또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정려원은 이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사제지간이란 관계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엔 나이가 6년 차이라서 처음에는 나 때문에 잘 커서 나에게 온다면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과 제자가 사랑에 빠지는 건 직업적 특성이 있어 다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무겁게 느껴졌어요. (시험문제로) 학원 강사분께 자문을 구했을 때, 학원 강사가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는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듣긴 했어요. 작품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캐릭터 특징을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장치가 아닌가 깊어요. 불편함을 드릴 수 있었을 거란 이해는 해요. (음주운전 장면은) 방송 직후에 모두가 놓쳤다고 생각했죠. 꼼꼼히 확인하고 집중해야 된다는 교훈이 됐고,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되는 거고요."
"대본을 집에서 다 외우고 현장에 놀러가는 마음이었어요. 일인데 너무 신나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죠. 저 혼자 엄청 뿌듯했고 항상 좋았어요. 다만 형편이 좋아져서 대본을 완벽하게 만끽하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장이 있고, 뭐가 나올지 모르는 현장이 있더라고요. 이제는 다 아니까 시뮬레이션을 다 돌려보고 갔을 때 현장이 딱 맞아 떨어지면 쾌감이 느껴져요. 또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구현되는 걸 보면서 더 쾌감이 들더라고요."
'국민 첫사랑' 수식어부터 전문직에 강한 배우까지, 정려원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아직도 회자되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희진이는 이제 보내주고, 지금까지처럼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해나갈 계획이다.
"'국민 첫사랑'이란 수식어 자체가 너무 좋고 감사하죠. 그렇지만 평생 첫사랑 할 건 아니니까, 싫어도 보내줘야 될 것 같아요. 또 멜로여도, 만약에 검사여도 들어오는 대본이 재미있으면 다시 하지 않을까요? 전문직 장르 드라마를 자주 하기도 했어요.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막무가내 재벌 3세 역할을 하면서 쾌감을 느꼈거든요. 그 후로 주체적이고 사람의 허를 찌르는 그런 역할을 많이 했는데 아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