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7.23 전당대회에 출마한 한동훈 당 대표 후보가 비대위원장 시절 김건희 여사의 텔레그램 문자 메시지를 다섯 차례 묵살했다는 이른바 '읽씹(읽고 무시)' 공방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김 여사의 사과 의사를 무시했기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다는 주장은 참패 책임에도 불구하고 출마한 한 후보를 정면 겨냥한다.
반면 한 후보는 김 여사 뿐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 역시 '명품백' 의혹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친윤계와 원 후보 등 자신의 반대 측에서 공세를 펴기 위해 사적으로 내밀한 문자까지 공개했다며 '조직적 구태정치'의 피해자임을 내세우고 있다.
양측의 공방은 권력 핵심부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제 살 깎기'식임은 물론 야권에 특검의 빌미까지 내주고 있다. 친윤계로선 한 후보의 당권 접수를 막기 위해 극약 처방에 기댄 셈인데, 별다른 약효도 못 보고 약점만 드러내는 상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 후보 역시 소수의 우군을 제외하곤 여권 주류 세력과 척지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당 대표가 되더라도 분열된 여당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元 "고의로 총선 패배 이끌었나" VS 韓 "문자 리크는 구태정치"
'읽씹' 논란에 대한 공방 자제를 촉구하는 당 선관위의 강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 후보를 향한 비판은 10일에도 계속됐다.
원희룡 후보는 이날 부산·울산·경남 지역 합동연설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설사 (김 여사) 주변에서 (사과를) 다 반대한다고 한들, 당사자인 영부인이 집권 여당 책임자에게 그런 이야기했다면 대통령을 설득할 한줄기 빛, 최후의 희망이 열린 것 아닌가"라며 "없는 것도 만들어야 하는 총선 승리가 절박한 상황에서, 고의로 패배로 이끌려고 한 게 아닌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한 후보는 "이런 식의 공작에 가까운 마타도어로 저의 당선을 막으면 우리 당이 괜찮아질까, 저는 그게 대단히 걱정스럽다"며 "저를 막기 위해서 이렇게 조직적으로 내밀한 문자를 계속 리킹(leaking·유출) 하는 건 대단한 구태정치"라고 반박했다.
김 여사가 보낸 문자 속 '댓글팀'이라는 단어는 추후 다른 차원의 의혹과 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김 여사는 지난 1월 23일 "제가 '댓글팀'을 활용해 위원장님과 주변에 대한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 너무도 놀랍고 참담했다"며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는데,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는 내용의 문자를 한 후보에게 보냈다.
국민의힘을 탈당한 옛 친윤계 장예찬 전 최고위원은 전날 한 방송에서 김 여사의 댓글팀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내용이고, 오히려 한 후보에게 우호적 여론을 조성해주는 팀이 별도로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 후보의 러닝메이트인 박정훈 의원은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정말 황당한 얘기라는 취지로 캠프에서 답변이 있었다"며 반박했다.
이 밖에 김 여사가 한 후보에게 사과 의사를 전하면서 다른 쪽에는 사과 불가 논리가 담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의혹, 김경률 전 비대위원의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 직후 윤 대통령과 한 후보가 전화 통화로 언쟁을 벌였다는 후일담 등 여권 핵심부의 내밀한 비공개 사건·사고들이 계속 폭로되고 있다.
이 같은 진실 공방과 폭로전, 비방전은 양측에 적잖은 후유증을 남길 전망이다. 김 여사에겐 전직 장관이자 총선 당시 당 대표에게 뜨거운 이슈였던 명품백 관련 사과와 관련한 내밀한 문자를 전했던 것이 공개됐다. 야권에선 이를 두고 "당무개입"이라며 '김건희 특검' 재발의의 지렛대로 삼을 조짐이다. 한 후보에겐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영부인의 문자를 다섯 차례나 무시한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당시 김 여사는 총선에 누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오랜 기간 두문불출하던 시기였다"며 "비대위원 일부가 이슈를 키워 대통령과 한 전 비대위원장 사이 갈등이 생기자 선거 총책임자인 한 전 위원장에 사과 의견도 진지하게 나누고 대통령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국민의힘 관계자는 "앞뒤 정황이 다 잘린 채, 어디서는 사과 의지를 내비치고, 다른 곳에서는 사과 반대를 외치는 모습이 계속 유출되면, 대통령 부부가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겠나"라며 "이제 후유증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단계인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민주당, 국정농단 프레임…與 대응은 부재, 단일대오도 위태
민주당은 김 여사가 한 후보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사안 자체를 겨냥해 '국정농단' 프레임을 내거는 동시에, 채 상병 특검법의 당위성을 살리는 데에도 활용하고 있다.민주당 박찬대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이날 "전문이 공개된 김건희 여사의 문자 내용은 경악 그 자체"라며 "총선 시기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김건희 여사의 광범위한 국정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해병대원 사건 수사 과정에서 등장한 대통령실 전화번호의 실제 사용자가 영부인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커질 수밖에 없다"거나 "문자에서 등장한 '댓글팀 활용'이라는 대목은 정권 차원의 여론조작 공작이 진행됐을 정황까지 시사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정권이 문을 닫아 마땅한 최악의 국정농단"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민의힘 차원의 맞대응은 부재중 상태다. 계파색이 옅은 한 의원은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지도부는 특정 입장에 서기 어렵고, 사실 확인도 안 되니 결국 보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수여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수호를 위한 단일대오도 붕괴 위기다. 문자 유출로 인해 친한계와 친윤계의 골이 깊어지면서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에도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치러지는 전당대회 이후 재의결이 이뤄지면, 상처를 크게 받은 쪽의 표 단속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내에서는 의도적으로 문자를 유출한 주체가 정국 자체를 꼬이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다선 의원은 "당 앞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사안을 전당대회에 끌어 온 주체가 문제"라며 "처음부터 선관위가 언급을 막았어야 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또 다른 재선 의원은 "문자 유출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믿고 싶지 않은 정황에 당원들의 동요만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