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만나, 혼인하는 건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 관계를 '인위적으로' 정리하는 '이혼' 역시 커다란 일이죠.
우리나라에서 부부인 이들이 '이혼'을 하려면 조정이나 재판을 통해야만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얽히고설킨 감정은 '정신적 고통'이란 이름표 아래 묶이고 위자료로 산정됩니다. 혼인 기간 이룩하고 축적한 재산도 나눠야 하죠.
1심보다 위자료도, 재산분할 액수도 20배나 뛰어오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도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항소심 선고 이후 대법원 판단을 받겠다던 최 회장이 최근 확정 증명을 신청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뒷말도 따라붙었습니다. 재산분할 액수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혼은 성립됐다고 확인해달라는 것이냐고요.
오늘의 '법정B컷'은 선고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논쟁 중인 '두 사람'의 이혼과 그간 이혼을 둘러싼 법원의 판단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1조3808억짜리 이혼…재산분할은 불복, 이혼은 인정?
최 회장 측은 지난달 21일 이혼 소송을 맡은 재판부에 확정 증명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발급 불가'라며 이를 거부했죠. 법원은 최 회장 측에 한 차례 의견서 제출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관련기사:[단독]"이혼 확정해 달라?"…SK 최태원, 법원에 '확정증명' 신청)
시점이 주목됩니다. 통상 확정 증명은 재판이 완전히 종료된 것을 증명해 달라는 취지로 신청하는데, 최 회장이 상고장을 제출한 바로 다음 날 이를 별도로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고할 때는 다퉈야 하는 부분에 더 집중해야지 이혼 신고 자체가 그렇게 급할까 싶어요. 이례적이죠."
최 회장 측이 대법원에서 재산분할과 위자료 액수는 다투겠지만, 두 사람의 혼인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은 먼저 확정 지어 달라는 취지로 확정 증명을 신청했다는 겁니다.
"상고할 때는 다퉈야 하는 부분에 더 집중해야지 이혼 신고 자체가 그렇게 급할까 싶어요. 이례적이죠."
최 회장 측이 대법원에서 재산분할과 위자료 액수는 다투겠지만, 두 사람의 혼인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은 먼저 확정 지어 달라는 취지로 확정 증명을 신청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법조계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동거인인 티앤씨재단 김희영 이사장을 가족으로 등록하고, 후속 법적 효력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나옵니다. 이혼 소송에서는 확정 증명을 받아야 가족관계 등록 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SK측은 '그룹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는 아니'라며, 회장 개인 문제로 공식 입장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17일 항소심 판결문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며 기자회견을 자처한 최 회장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24.06.17 SK그룹 기자회견 中 |
최태원 회장 "재산분할과 관련해서 객관적이고 명백한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류는 주식의 분할 대상이 되는지, 주식이 분할 대상이 되는지 얼마나 돼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에 속하는 아주 치명적이고 큰 오류라고 들었습니다. (중략) 제6공화국의 후광으로 SK역사가 전부 부정당하고 후광으로 저희 사업을 키웠다는 판결의 내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저뿐만 아니라 SK그룹 구성원 모두의 명예와 긍지가 실추되고 훼손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바로잡고자 상고를 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SK의 명예가 달려 상고에 나섰다는 최 회장, 그럼에도 '개인적' 일이라는 1조3808억원짜리 두 사람의 이혼은 어떤 결론을 맞이할까요.
"'바바리코트' 찢어졌으니 이혼해달라"…유책주의냐 파탄주의냐
우리나라는 잘못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유책주의(有責主義)입니다. 그 반대 선상엔 책임 소재의 판단은 미뤄두고 한쪽이 이혼을 원한다면 이혼이 받아들여지는 '파탄주의'가 있습니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으로 법원이 유책주의를 다시 확인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법원은 최 회장을 '유책 배우자'로 보고, 최 회장의 이혼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막는 규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의 판례 태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초는 1965년 9월 대법원 판례입니다. 외도를 저지른 남편이 낸 이혼 청구가 발단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외도 사실을 직장에 알리는 바람에 일을 그만둬야 했고, 아내가 자신의 바바리코트를 잡아당겼다는 이유를 들며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대법원 1965. 9. 21 이혼 선고 판결문 中 |
청구인과 피청구인이 별거 생활과 가정불화로 인하여 다소의 싸움을 하였을 뿐 아니라 청구인의 바바리코트 등을 잡아당겨 찢어지게 한 사실만으로는 피청구인에게 재판상의 이혼 사유가 있다고 인정할 수 없고, 도리어 청구인이 가정의 평화와 남녀의 본질적 평등을 무시하고 그 책임에 속하는 축첩행위를 하였을 뿐 아니라 내연의 처에 대한 애정에만 사로잡혀 피청구인을 돌보지 않고 냉대한 결과 가정의 파탄을 초래한 사실을 확정하고 청구인의 이혼 청구를 배척하였음은 정당하다. 청구인과 피청구인 사이에 청구인의 축첩 생활에 기인한 애정의 냉각이 있다 하여 축첩을 한 청구인이 애정의 냉각을 이유로 재판상 이혼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며…(후략) |
그 뒤로 50여 년이 지난, 2015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년 전 집을 나가 혼외자를 낳은 남성이 이혼 청구를 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책주의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다만 일방적 이혼이나 축출 이혼 염려가 없는 경우, 고통이 점차 줄어 쌍방의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가 된 경우 등에는 예외가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판결 이후 50년의 세월이 지나서일까요. 당시 대법관들의 의견은 7대 6으로 나뉘어 팽팽했습니다. 소수의견은 '허울뿐인 혼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으니, 파탄주의 역시 허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2015. 9. 15 이혼 선고 소수의견 中 |
혼인 생활의 과정과 파탄의 경위 등에 비추어 보면 원·피고의 혼인 관계는 파탄되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혼인 생활의 계속을 강제하는 것이 원고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된다고 할 것이며, 이 사건 이혼이 정의·공평의 관념에 현저히 반하지 아니한다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정들도 상당히 나타나 있다. 그뿐 아니라 다수의견에 의하더라도 세월의 경과 등에 따라 원·피고 쌍방의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여 원고의 유책성이 그 이혼 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아니하다고 볼 여지가 있으므로 (후략) |
시대 흐름상 파탄주의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유책주의를 택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파탄주의를 논하는 것과 동시에 위자료 액수를 높이는 등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파탄주의라 하더라도 이혼을 제한하는 가혹조항이나 잘못 없는 배우자나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부양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겁니다. 2015년 당시 대법원도 그런 점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 2015. 9. 15 이혼 선고 |
우리나라에는 파탄주의의 한계나 기준, 그리고 이혼 후 상대방에 대한 부양적 책임 등에 관해 아무런 법률 조항을 두고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유책배우자의 상대방을 보호할 입법적인 조치가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현 단계에서 파탄주의를 취하여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널리 인정하는 경우 유책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결과가 될 위험이 크다. |
사실 '두 사람'의 이혼 소송에서는 처음 이혼에 반대하던 노 관장이 이혼 소송에 같이 나섰기에 유책주의냐, 파탄주의냐 자체가 쟁점은 아닙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가 유책주의를 공고하게 해석해 최 회장에게 일종의 '괘씸죄'가 매겨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기도 했었죠. 재산분할 액수도 그렇지만, 지금껏 이혼 소송에 20억원의 위자료가 나온 것도 전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여도 자체만 놓고 보면, 부부 쌍방의 기여를 절반씩 인정하는 흐름에 비해 노 관장에게 인정 된 기여도 35%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대법원行 이혼 '확정'까지는 시간 걸려
우리나라가 파탄주의를 택했다면, 최 회장과 노 관장의 혼인은 일찌감치 종지부를 찍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 회장과 티앤씨재단의 김희영 이사장과의 부정행위가 시작된 시점을 최 회장이 시인한 2009년이 아닌 최소 2008년으로 특정하는 한편, 별거 기간도 상당했다고 인정했거든요.
24.05.30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항소심 선고 中 |
원고(최 회장)와 이 사건 주요 당사자가 되는 부정행위 상대방인 김희영과 관계가 문제 됩니다. 김희영은 2008년 6월 미국에서 전남편 상대 이혼소송을 제기한 다음, 11월 이혼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원고가 피고(노 관장)에게 보낸 11월 24일 자 자필 편지를 보면 '내가 김희영에게 이혼하라고 했다', '모든 것이 내가 계획하고 시킨 것이다'라고 돼 있습니다. 이는 혼인 관계의 유지·존속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고 결정적입니다. 만약 원고가 피고와 혼인 관계 존중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 없고 계획적으로 실행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 옥중 편지 등을 봤을 때 김희영이 이혼소송을 제기할 무렵인 2008년 6월, 이미 부정행위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략) 원고가 시인하는 부정행위의 첫 시점은 2009년 5월 초경입니다. 2010년에 혼외자를 낳고 2011년 일방적으로 가출해 현재까지 (노 관장과) 십 수년간 별거하면서 (동거인과) 사실혼 관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략) 원고는 2015년 11월에 내연녀가 있고, 혼인 관계 지속이 어렵다고 일방적으로 공개하고, 원고 자신의 혼인 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김희영과 티앤씨재단을 설립했고, SK 포도뮤지엄을 개관, 전시 총책임자로 참여시키는 등 현재까지 김희영과 공개적인 활동을 지속하면서 마치 배우자와 유사한 지위에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상당 기간 부정행위를 지속하며 공식화하는 등 헌법이 특별히 보호하는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
다만, 우리나라가 파탄주의를 받아들였다면, '40조원짜리' 이혼이라 불리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이혼처럼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 액수가 더 올라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 회장은 지난달 24일 판결문 경정에 대한 재항고장도 낸 상태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2017년 시작된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이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 없습니다. 대법원 판단이 남은 두 사람의 이혼 소송 '확정'까지는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