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노동당국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난 경기 화성 1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의 책임 소재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아리셀의 모기업인 에스코넥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리셀과 에스코넥의 대표이사가 동일한 데다 아리셀 지분의 96%를 에스코넥이 보유하고 있는 점, 아리셀의 매출 실적 등을 사실상 에스코넥이 관리하고 있었던 점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수사당국, 이르면 이번 주부터 피의자 소환 예정
1일 경기남부경찰청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이들은 최근 아리셀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리튬 배터리 제조 공정 관련 자료와 안전 분야 관련 서류, 전자정보 등을 분석하고 있다.특히 경찰은 화재 원인과 대규모 인명피해 발생 원인 등을 집중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번 화재가 여러 인과관계가 누적된 '총체적 부실'에 의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에 따라 아리셀 공장 내 불법 구조 변경 여부, 배터리 보관 원칙 준수 여부, 소방시설 구비 여부 등을 들여다 보고 있다.
경찰과 노동부는 에스코넥·아리셀 박순관 대표와 인력공급 업체 메이셀 관계자 등 관계자 5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이번 사고는 피해 규모가 유례없이 크고,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화재 위험성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사업주의 안전·보건 조치 의무 위반 정황이 발견되면 중대재해처벌법상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리셀, 사실상 에스코넥 차입금으로 운영…승계와도 연관
이와 함께 이번 수사가 아리셀의 모기업인 에스코넥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리셀이 구조적으로 사실상 에스코넥의 적극적인 관리 아래에서 운영됐기 때문이다.에스코넥과 아리셀의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리튬 1차전지 제조업체인 아리셀은 2020년 5월 에스코넥의 전지사업부문 자회사로 설립됐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대표이사는 박순관 에스코넥 대표이사가 겸직하고 있다.
아리셀은 모기업 에스코넥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 에스코넥은 아리셀 설립 당시 50억원을 투자한 이후 매년 차입금을 지급해 운영자금을 마련해줬다. 에스코넥이 지금까지 아리셀에 보낸 차입금은 155억원에 이른다.
에스코넥은 아리셀에 차입뿐만 아니라 지급보증, 100억원 규모의 외부 투자도 유치해줬다. 그럼에도 아리셀의 실적은 부진했다. 2020년 설립된 해 매출 5억원·영업손실 41억원, 2021년에는 매출 8억원, 영업손실 68억원을 기록했다. 실적부진이 이어지면서 2022년말 아리셀의 총 자산은 242억원이었고, 부채총계는 252억원이었다. 완전 자본잠식 상태였다.
아리셀은 에스코넥이 빌려준 돈 155억원 가운데 60억원을 지난해 출자전환하면서 겨우 자본잠식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출자전환은 기업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셀 설립 당시 66.7%였던 에스코넥의 지분율도 현재는 96%로 급증했다. 올해 3월말 기준 아리셀의 자산은 248억원이고 부채는 238억원이다.
에스코넥이 이처럼 아리셀을 적극 관리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는 박순관 에스코넥 대표가 아리셀의 지분 6.25%를 소유하고 있다. 아리셀 주식 액면가 500원 기준으로 10억원을 직접 투자했다.
둘째는 아리셀이 에스코넥의 승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5월 취임한 박중언 아리셀 사내이사는 박 대표의 아들이다. 그는 아리셀의 사업 전반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코넥, 자회사 설립 전부터 '아리셀' 제품 브랜드로 홍보
에스코넥이 아리셀이 제조한 배터리의 영업을 도맡아 한 점도 아리셀 화재 참사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로 지목된다.에스코넥의 투자보고서와 한국IR협의회 기술분석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 회사는 2017년 9월 방위사업청에 75억900만원 규모 리튬 1차전지 공급사업을 수주해 2018년 11월 납품을 완료했다. 당시 납품한 일차전지의 상품명은 '아리셀'이었다.
이후 에스코넥은 2020년 5월 1차전지 제조시설을 갖춘 동명의 기업 '아리셀'을 설립했다. 에스코넥은 아리셀이 제조·판매한 1차전지 매출을 에스코넥의 '전지사업 부문' 매출로 표기하고 있다.
에스코넥 기업 홈페이지 역시 아리셀의 배터리를 에스코넥의 생산 품목으로 표기해 홍보하고 있다. 외부에서는 아리셀이 제조한 1차전지가 에스코넥의 상품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홈페이지에 따르면 아리셀의 1차전지는 스마트미터기, 의료장비, RFID(무선 주파수를 이용해 물건이나 사람 등과 같은 대상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 등에도 이용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하청 실질 지배하는 원청에서 산재 발생…처벌 가능"
중대재해처벌법은 일종의 과실법이다. 즉 법률이 정한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될 때 적용하는 범죄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업장에서 1명 이상이 사망하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적용할 수 있다.또 하청업체를 실질적으로 지배·관리·운영하는 원청업체가 재해 예방에 필요한 인력이나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가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의무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규칙 225조는 "사업주는 위험물질을 취급하는 경우 폭발·화재 및 누출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방호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리튬과 같은 위험물질을 '물반응성 물질'로 정하고 이 물질에 화기나 점화원이 될 우려가 있는 것에 접근시키거나 발화를 촉진하는 물질 또는 물과 접촉·가열·마찰·충격을 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노동건강연대 유성규 노무사는 "수사당국의 조사가 나와야 하겠지만 단순 지표로 보면 에스코넥과 아리셀의 관계는 모기업이 자회사의 지분을 96% 소유하고 있으며, 두 업체의 대표가 동일한 점에서 모기업이 자회사에 대한 엄청난 지배·운영·관리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수사당국도 이러한 연관관계를 따져보고 중대재해처벌법을 확대 적용할 수 있는 조건에 해당하는지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30분쯤 경기 화성시 전곡해양산업단지 내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3동 2층에서 불이 나 23명(한국인 5명,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아리셀은 삼성전자와 삼성SDI의 1차 협력업체인 에스코넥의 자회사다. 에스코넥은 삼성전자에 스마트폰 부품을, 삼성SDI에는 전기차 배터리에 적용되는 소형 전지부품인 전류차단장치(CID)와 동전형 배터리(코인셀) 핵심 부품 등을 납품하고 있다.
참사 직후 아리셀은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해 경찰 수사에 대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