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어 저희가 이렇게 계속 감정 진행하고 재연 시험하는 모든 과정을 입증하듯이, 국과수나 제조사도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입증하고 책임을 지셔야 될 당위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22년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아들 도현(당시 12세)군을 잃은 아버지 이상훈씨의 말이다.
사고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약 7억 6천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이씨의 가족(원고) 측은 지난 달 19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급발진 재연 시험에 대해 법원이 지정한 감정인의 감정 결과를 지난 27일 발표했다.
이날 이씨는 "현행법상 입증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검증해 왔고, 또 감정 신청을 해 결과들이 나왔다"며 "지금까지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사고기록장치(EDR) 기록은 분명히 정확하고 객관적이겠지만, 그 기록은 에어백이 터지면서 전개될 때 자동차의 상태를 기록한 장치일 뿐인데 마치 운전자가 조작한 행위라고 분석하고 가정해 운전자가 이랬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추론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EDR 기록이 예를 들어 운전자가 조작한 행위로 기록한 장치라고 한다면 국과수나 제조사도 운전자가 조작한 행위인지 증명을 해야 한다"며 "그렇게 증명해 내지 못하고 마치 운전자가 타 있었던 자동차였기 때문에 운전자에 의해서 기록한 장치다라고 추론하고 가정할 뿐이지 운전자에 의해서 실제로 그렇게 기록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EDR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이긴 하지만 운전자에 의해서 기록한 것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며 "그렇다면 소비자가 입증 책임이 있어서 저희가 이렇게 계속 감정을 진행하고 재연하고 하는 모든 과정을 입증하듯이 국과수나 제조사도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입증하고 책임을 지셔야 될 당위성이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달 19일 원고 측이 법원에 요청한 '사고 현장에서의 가속페달 작동 시험' 감정이 강릉시 회산로에서 진행됐다. 경찰 협조로 이뤄진 감정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분석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2018년식 티볼리 에어 차량에 제조사(피고) 측이 제공한 '변속장치 진단기'를 부착해 실시했다.
국내 급발진 의심 사고 중 현장에서 실시한 첫 재연 시험으로 모든 준비와 비용은 이씨 측이 부담했다.
법원이 지정한 감정인이 한 달여 간 정밀 분석한 감정 결과를 보면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이라고 추정한 국과수의 분석 결과와 사뭇 달랐다. 재연 시험 결과 차량 제조사 측이 주장한 '변속 패턴'과 달랐고, 속도와 분당 엔진 회전수 같은 주행 데이터도 국과수 분석과 다소 차이를 보였다.
특히 사고 당시 도현이 할머니가 운전하던 차량이 처음 급가속 현상이 나타나면서 모닝 승용차를 추돌한 뒤 약 780m를 질주한 부분에서 국과수 감정과 차이를 보였다. 사고기록장치(EDR)를 토대로 '풀 액셀(가속페달 100%)'을 밟은 상태로 5초 동안 주행한 결과 속도가 시속 110km에서 116km로 증가했다는 국과수의 감정과 달리 2차례의 시험에서는 시속 124km에 이어 130km까지 증가했다.
이와 함께 국과수에서 '운전자가 변속레버를 굉음 발생 직전 D→N, 추돌 직전 N→D로 조작했다'는 분석은 이미 앞선 음향분석 감정을 통해 '변속레버 조작은 없었다'고 밝혀진 만큼, 변속레버 D 상태에서 운전한 게 사실이라면 국과수의 분석은 완전히 틀렸다고 원고 측은 주장했다.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하종선 변호사는 "1차 충돌 이후 풀 액셀 재연 시험보다 속도가 덜 오르고 느리게 오른 점과 110km/h에서 5초 동안 6km/h 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은 운전자였던 도현이 할머니가 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며 "도현이 할머니는 페달 오조작을 하지 않았음이 입증된 만큼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이라고 주장했다.
재연 시험 감정 결과 발표에 이어 원고 측은 강릉교회 주차장에서 자동 긴급 제동장치(AEB) 작동 여부에 대한 추가 재연 시험도 진행했다. 운전자가 변속레버 중립(N) 상태에서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아 AEB가 해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국과수 분석을 반증하기 위해서다.
재연 시험은 3차례에 걸쳐 실시했다. 첫 번째 시험은 시속 40km로 액셀 페달을 밟으면서 주행하다 전방 추돌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액셀 페달을 뗐고, 두 번째 시험은 시속 47km로 주행 중 경고음이 울린 뒤에도 액셀 페달을 계속 밟은 상황을 가정했다. 끝으로 47km로 주행하다 경고음이 울렸을 때 변속레버를 D에서 N으로 변경하고 액셀 페달을 밟은 상황을 재연한 결과 모두 충돌 직전 멈추는 결과가 나왔다.
다만 이번 재연시험은 법원에 감정신청을 하지 않고 진행하는 사적감정의 재연시험이라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지는 미지수다. 이에 원고 측은 객관성과 공정성, 합리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 언론사 등의 참관 하에 공개적으로 재연 시험을 진행했다.
이날 추가 시험재연을 마친 뒤 하종선 변호사는 "세 가지 시험에서 모두 AEB가 작동한 만큼 국과수가 분석한 속도대로 차가 주행했을 때 AEB가 작동했었어야 했다"며 "사고 당시 모닝 차량 앞에서 멈췄다면 그 이후 주행이 없었고, 또 도현이가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모닝 차량을 앞에 두고 작동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결함이고 치명적인 사망 사고를 발생시킨 또 하나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도현 군의 아버지 이씨는 "이 모든 과정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국과수 감정 결과 뒤에 숨어 제조사는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결국 국과수 감정 결과는 자의적인 추론으로 가능성으로 일관되게 검증을 했다라는 것"이라며 "국과수가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과 장비와 환경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인 저희가 할 수 박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현행법상 제조물 책임법이 결함 원인에 대한 입증 책임이 제조사가 아닌 소비자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던 이유고, 앞으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일명 도현이법)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울분이 터지는 이 상황들을 계속해서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며 "21대 국회에서 그렇게 목소리 높여 외쳤건만 국민의 소리는 외면되고 21대가 끝났다. 하지만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다시 한 번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국민동의청원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22년 12월 6일 오후 4시쯤 강릉시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A씨가 몰던 SUV 승용차가 도로 옆 지하통로에 빠지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해 함께 타고 있던 도현 군이 숨지고, A씨가 다쳤다.
이에 유족들은 지난해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결함 원인 입증책임 전환 제조물 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을 게시했다. 해당 청원은 국민들의 공감을 사면서 5일 만에 국회 소관위원회 및 관련 위원회 회부에 필요한 5만 명을 넘어 국회에서 관련법 개정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답보 상태를 보이면서 오는 29일 21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내 첫 재연 시험의 감정평가 결과 반영된 재판은 다음 달 18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속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