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제에서 역사상 총 2595건의 대통령 거부권이 발동된 바 있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임기 중 635건의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지만, 탄핵이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도 거부권을 11번 행사한 바 있고 최근 이스라엘 무기 지원 강행 법안인 이스라엘 안보 원조 지지 법안 역시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10번째 거부권 행사에 대한 집권 여당 국민의힘의 '쉴드'입니다. 635건이라니, 숫자만 비교해보면 윤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남발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수긍이 갈 듯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이 어떤 맥락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는지 따져보고 여당의 쉴드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죠.
루즈벨트는 왜 거부권을 남발했나
조금만 따져보더라도 여당의 비교는 다소 비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우선 물리적인 시간이 다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집권했습니다. 더욱이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했고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전시 상황이라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외국으로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등 전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의회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겠죠.
뿐만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생경한 대규모 국책 사업 '뉴딜 정책'을 시행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의회는 반(反) 뉴딜 법안은 물론 국가 재정을 쏟아붓는 법안에 자신의 지역구 현안을 슬쩍 껴넣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런 법안들에 얄짤없이(?) 거부권을 행사했고요.
특히 대공황의 여파가 이어졌던 임기 초반엔 특정 기업에 대한 구호를 골자로 하는 법안들에 대한 거부권 행사도 많았습니다. 지역구 의원들의 사심(私心)이 가득 담긴 법안들, 국가 재정을 방만하게 쓰는 법안들에 대한 행정부의 견제로 볼 수 있겠습니다.
결정적인 차이가 보이시나요?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배우자와 관련한 의혹을 수사하자는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사감이 담긴 거부권 행사였다면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한 대통령이더라도 4번 연임을 하긴 어려웠겠죠.
"나도, 아들도 수사하라" 특검 수용했던 바이든 대통령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 역시 정책에 대한 견해 차에서 기인했습니다. 첫 거부권은 연기금 운용사가 투자 결정을 내릴 때 환경과 사회적 책임 요인 등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한 의회 결의안에 대한 거였죠. 바이든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가 연기금 펀드매니저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재무적 요인만 고려하도록 한 데 대해 기후변화 등 ESG 관련 요인까지 아울러 고려하도록 개정을 했었는데,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이를 뒤엎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겁니다. 나머지 거부권도 비슷한 맥락에서 행사했습니다.
여당이 언급한 두 미국 대통령과 윤 대통령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본인과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미 법무부는 지난해 8월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의 재정 및 사업 거래 관련 의혹을 수사해온 델라웨어주 연방검사장 데이비드 웨이스를 특별 검사로 지명했습니다. 공화당은 수개월 동안 메릭 갈런드 법무부장관에게 특검 도입을 요구했죠. 웨이스 검사장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임명된 검사장입니다.
아들 특검 뿐만 아니라 바이든 대통령 본인이 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기밀 문건을 유출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특검 수사는 진행된 바 있습니다. 수사를 진행한 로버트 허 특검은 올해 초 수사를 마친 뒤 불기소를 결정하면서 "동정심 많고 선의를 가졌지만, 기억력이 나쁜 노인(sympathetic, well-meaning, elderly man with a poor memory)"이라고 해 정치적 파장을 키우기도 했었죠.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점은 미국의 경우 대통령 본인에 대한 특검 수사를 진행할 때 주로 야당 출신이거나 야당 성향이 있는 인물을 특검으로 임명한다는 점입니다.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성(野性)이 강한 검사가 특검 수사를 진행하면 야당으로서도 수사 결과를 두고 왈가왈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죠.
"봐주기 의혹 있으면 그때 특검하자" 거부한 尹대통령
윤 대통령은 어땠을까요. 지난 9일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은 "채 상병 사건 같은 경우 대통령실 외압 의혹과 대통령님께서 국방부 수사 결과에 대해서 질책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에 대해서도 입장 부탁드리겠다"고 물었습니다. 이른바 'VIP 격노설'에 대한 질문으로, 윤 대통령이 임성근 사단장 등이 혐의자로 포함된 1차 조사 결과를 보고 격노해 갑자기 내용과 절차가 뒤바뀌어버렸다는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겁니다.
이에 윤 대통령은 "순직한 사고 소식을 듣고 저도 국방장관을 질책했다"는 동떨어진 답변을 했고요. 특검 요청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경찰과 공수처가 수사하고 있고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진상을 규명할 것"이라며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라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을 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같은 답변이 나온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결국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고요.
배우자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법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대장동 50억 클럽 특혜 의혹 특별검사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요.
이관섭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직후 브리핑을 통해 "이번 특검 법안들은 총선용 여론조작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많은 문제점이 있다"며 "총선 기간에 친야 성향의 특검이 허위 브리핑을 통해 국민의 선택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고 거부권 행사 이유를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관련한 특검을 두고도 미국 민주당(여당)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었죠. 대선을 겨냥한 수사 아니냐고요. 그럼에도 특검 수사는 진행됐던 겁니다. 대통령 본인이나 그 가족과 관련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특검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서 말이죠.
여당이라고 윤 대통령의 10번째 거부권 행사가 달갑진 않을 겁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대략적으로 3분의 2 이상의 응답자가 찬성하는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것 역시 부담스러울 거고요. 그럴 수록 미국 대통령들의 공과(功過) 중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取捨選擇)'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