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당원권 강화 움직임이 점입가경이다. 국회의원들만 투표권을 갖는 원내 선거에 당심을 반영하자는 비율이 10%에서 50%까지 높아지는가 하면, 국회의장 자리를 사실상 예약한 중진 의원은 쟁점법안 처리를 약속하는 등 의장의 역할 범위를 그간의 '심판'에서 벗어나 '선수'로 뛰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흐름은 그간의 관행은 물론 국회법 등 실정법을 위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다, 국회의원의 헌법기관적 지위까지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우려를 사고 있다.
난상토론서 쏟아진 당원 강화안들…"국회의장 선거도 의원 50%, 당원 50%로 뽑자"
22일 CBS노컷뉴스의 취재를 종합하면 민주당은 전날인 21일 저녁 예정에 없던 당원 난상토론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이재명대표 주관 해병대원특검과 민주당의 갈 길, 당원 난상토론'으로, 앞선 이날 일어난 윤석열 대통령의 채 상병 특검(특별검사)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비판하자는 취지였다.당초 초선 당선인 중심의 시국성토대회였던 이 행사는 이 대표가 직접 주관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3시간여 동안 진행된 토론에서는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는데, 정작 이목을 끈 것은 당원권을 강화하자는 목소리였다. 채 상병 특검법안 처리 방안을 논의하자는데 이와 무관한 당원권 관련 내용이 상당 부분 거론됐기 때문이다.
가장 눈길을 끈 내용은 양문석 당선인의 발언이었다. 그는 "우리 당의 의장 후보를 뽑을 때도, 원내대표를 뽑을 때도 의원 50%, 당원 50% 비율을 적용하자"고 말했다.
이는 당내에서 최초로 원내 선거에 당심을 반영하자고 제안한 김민석 의원의 '10% 반영' 룰보다 당원 비중을 5배나 높인 수준이다. 김 의원은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10%면 당원권 확대에 대한 논의의 출발로서는 실질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수준"이라며 "이번 사건(국회의장 경선)이 촉발점이 된 것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앞으로 그런(당원권 확대) 쪽으로 계속해서 확대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의원 이후 장경태 최고위원이 "20% 정도는 반영돼야 한다"며 김 의원보다 2배 높인 수준을 제시했는데, 양 당선인은 이를 5배로 한 차례 더 높였다.
난상토론에서는 원내 선거 뿐 아니라 당에서 조직적으로 당원의 권한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대표는 "김윤덕 사무총장이 의견을 하나 냈다. 당원국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며 "당원이 100만명이 넘고 당비가 연간 180억원이 넘는데 당원들과 소통하는 전담 당직자가 없다"고 '당원주권국' 신설을 언급했다. 윤종군 원내대변인은 기존의 '전국대의원대회'를 '전국당원대회'로 바꾸자고 제시하기도 했다.
"국민의 뜻" 강조하며 입법 성과 내겠다는 차기 국회의장
이런 상황에서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맡게 될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국민과 함께 채 상병 특검(특별검사)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며 당심에 가까운 의정활동에 나설 뜻을 밝혔다. 우 의원은 페이스북에 '민심불복 거부권행사, 국회가 바꿔내겠다'는 글을 올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직접적으로 비판했다.그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인용, 대통령의 재의요구 권한이 입법부를 견제하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 아니라 국민이 위임했기 때문에 부여받은 권한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재의요구권 사용의 경우 국민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재량 범위를 넘은" 것이라고 직격했다.
우 의원이 근거로 삼은 '국민의 뜻'은 여론조사 결과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9일부터 1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 결과, 채 상병 특검법을 21대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응답이 67%로 나오며 반대 19%를 압도했다. 보수층에서도 찬성 응답이 49%로 나타나 반대 35%를 크게 상회했다.
대의제 민주주의·국회법 반하는 민주당내 기류…"정당보다 국민 바라봐야"
하지만 이 같은 당원권 강화 움직임은 대한민국이 정치제도로 채택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어서 당 안팎의 우려가 적지 않다. 간접 민주주의의 일종인 대의제 민주주의는 정당의 당원을 비롯해 유권자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할 각급 의원과 단체장, 대통령 등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까지만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원내에서 진행되는 국회의장이나 상임위원장 선거, 당내 선거이긴 하지만 국회의원만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원내대표 선거 등에 대해서는 당원의 의사 등이 직접적으로 반영돼서는 안 된다.
국회의장과 부의장의 경우 국회법 제15조에 의해 국회에서 재적의원들의 과반 득표를 받은 의원이 선출되도록 규정돼 있다. 이 과정에 당원의 의사가 반영되면 국회법 위반, 실정법 위반인 셈이다. 국회의원이 헌법기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위헌 소지도 있다.
국회의장의 '역할론'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국회의 구성 자체가 의원들이 모인 회의체이기 때문에 본회의를 주재하는 국회의장은 이 회의체가 합의안을 도출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하지만 당장 다음달 초부터 국회의장직을 맡게 될 우 의원은 "윤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국민의 뜻을 받들어 채 상병 특검법을 받아들이시라", "특검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와 같은 야당 중심의 메시지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국회의장 경선과정에서 발생한 논란을 의식해 "무엇이 국민에게 옳은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며 '중재자'의 역할보다는 '판단자'가 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같은 기류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지나친 쏠림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의 한 다선 의원은 "IT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해서 당원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진 만큼 그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당원과 선출직 공직자는 역할과 권한이 다른데 '당원 덕에 당선이 됐으니 무조건 당원 뜻에 따르라'는 것은 의원이 필요없다는 말과 같지 않느냐"고 토로했다.
국회의장의 역할 확장에 대해서도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은 "의사일정 합의라는 표현이 있듯 의사진행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의장은 민주당의 주요 법안 추진에 여당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협치와 협의를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본인부터가 이렇게 확실하게 색을 드러내면 국회에서 논의가 이뤄지겠느냐"고 우려했다.
마지막 기자간담회를 가진 김진표 국회의장은 "민주주의의 최전선이자 최후의 보루인 국회의 수장으로서 의회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비로소 역대 국회의장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다"며 "앞으로 국회의장이 되실 분들도 같은 고민을 하며 의회주의를 지키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아 주시리라 믿는다"고 차기 국회의장의 역할을 당부했다. 의원들에 대해서도 "대개 국회의원은 지지의 90~95%를 당원이나 팬덤이 아닌 일반 국민에게 받아서 당선된 것"이라며 "당원이기 이전, 자신을 공천해준 정당에 대해 충성하기 이전에 유권자의 눈높이로 그분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분들에게 미래 희망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헌법 기관으로서의 책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