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숙원사항에 보수 정권이 이례적으로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의 노동법원 설치 주장에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이다.
尹 "우리 사회, 노동법원 설치 필요한 단계…임기 중 관련 입법 준비하라"
윤 대통령은 지난 14일 제25차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우리 사회도 노동법원 설치가 필요한 단계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이어 "기업이 멀쩡히 돌아가거나, 기업이 망했는데 (사장이) 자기 재산만 따로 챙기고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은 반사회적 정도가 아니라 반국가 사범"이라며 "(주무부처인) 노동부가 법무부, 필요하면 사법부와도 협의해서 제 임기 중에 노동법원 설치 관련 법안을 낼 수 있게 지금부터 빨리 준비해달라"고 주문했다.
노동법원의 설치 이유에 대해서는 "노동법 위반만 다루고, 해고가 공정했냐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법을 위반해 민사상 피해 입었을 때 원트랙으로 같이 다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체불 임금이나 노동자들의 피해, 또 더 큰 이슈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도록 노동법원의 설치를 적극 검토할 단계가 됐다"고 설명했다.
노사관계도, 노동현장도 모르는 판사들…노동법원, 전문성·신속성 두 마리 토끼 잡을까
노동법원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노동계와 법조계 곳곳에서 수십 년 전부터 논의됐던 사안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전문가 자문기구 21세기위원회가 노동법원 설치를 제안한 바 있고, 특히 참여정부 시절에는 사법개혁위원회에서 지금은 현실화된 국민참여재판, 법학전문대학원 등과 함께 노동법원 설립을 본격 준비하기도 했다. 입법부에서도 18대 국회부터 빠짐없이 노동법원을 설치하자는 법안이 발의됐다.
노동법원의 장점으로는 △사실상 5심제 이상으로 길어지는 재판 단축 △법관의 노사관계에 대한 전문성 부족 문제 해결 △판결 결과에 대한 신뢰 제고 등이 꼽힌다.
대개 노사분쟁에서 '시간은 사용자의 편'이다. 임금이 체불되고, 갑질에 상처받고, 노조를 만들면 부당노동행위를 당하고, 끝내 부당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와 법적 공방을 벌일 때면 임금을 제대로 받아 생계를 잇기 어렵기 마련이다.
어느 재판보다도 서둘러야 하지만, 정작 노사분쟁은 일명 '5심제'로 재판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건은 지방법원부터 대법원에 이르는 3심제인 반면, 노사분쟁은 각급 노동위원회를 거친 후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차례로 판결을 받는다. 또 노사분쟁마다 따라붙는 민사소송으로 사실상 8심제인데다, 여기에 상급 법원에서 파기 환송이라도 하면 재판은 더 길어진다.
특히 산업이 고도화되고 복잡한 원하청 구조나 특수고용노동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 등이 부상하면서 고용형태에 관한 굵직한 재판이 열릴 때마다 논란을 불렀다. 최근 산업안전 이슈가 주목받으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을 어떻게 적용해 판결할 것인지도 고민거리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사법부가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절실한 상황이다.
만약 행정법원이나 가정법원처럼 전문화된 노동법원이 설립되면 다른 사건처럼 3심제 형태로 재판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사분쟁의 피해부터 서둘러 구제할 수 있는 특례 절차를 마련할 근거도 생긴다. 또 노동법원을 맡는 노동 전문법관도 양성할 수 있고, 법조지망생들이 노동법의 가치를 달리 인식할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동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문성도 떨어지는 법원 판결에 대화와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각종 분쟁부터 빚던 노사 문화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과거 사법개혁위원회는 '참심관' 형태의 노동법원이 판결에 대한 신뢰를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처럼 각각 노사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재판에 참여하면 더 전문적인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논리다.
하루아침에 입장 바꿔야 할 노동부지만…"노동법원 임기 내 추진, 尹 의지에 달렸다"
반면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노동법원 설치에 회의적이었다. 노사분쟁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체불 등 간단한 사건들은 95% 이상 각급 노동위원회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노동위원회가 법원보다 비용이나 기간, 소송 준비 부담이 훨씬 적다는 명분이다. 또 경영계는 참심원 재판이 오히려 노사 갈등을 더 부추길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한발 더 들어가 조직 내부 논리로 보자면, 행정부가 쥐고 있던 심판 기능을 사법부에 돌려주는 꼴이다. 노동부 본부 규모에 버금가는, 장관급인 중노위원장 아래 전국 12개 위원회 조직이 한번에 주저앉으니 공무원들로서는 힘이 빠지는 얘기다.
하지만 당장 윤 대통령에게 자신의 임기 안에 노동법원 입법 준비를 마치라고 주문받은 당사자인 노동부는 혼란에 빠졌다. 줄곧 노동법원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노동부가 하루아침에 찬성 논리를 마련해야 할 상황이다.
한 노동부 관계자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미리 조율됐거나 준비된 얘기가 아닌 것으로 안다"며 "과거부터 관련 논의야 많았지만, 이번 정부 들어 특별히 부처 차원에서 노동법원 설립을 준비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당시 윤 대통령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 모두 '전문법원'을 신설·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다만 당시 윤 대통령의 공약 가운데 통합가정법원이나 해사전문법원만 거론했을 뿐, 노동법원은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 관련 민사·행정 사건을 전담하는 1심 노동법원을 설치하겠다는 공약은 이 후보가 내놓았다.
지난 참여정부나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민주당은 여당으로 노동법원 설립을 추진해왔다. 당장 21대 국회에도 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여소야대 국면에도 법안 내용에 따라 충분히 야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법조계도 노동 문제에 관심이 있는 법관들을 중심으로 TF 등을 꾸리며 노동법원 설립 준비를 여러 차례 논의한 바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지난해 12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노동법원에 대해 "노동사건이 굉장히 법리가 어려워 지체되는 사건이 많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이사장은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사법부 안에서 나름대로 노동법원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고, 관련 논의도 있었다"며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의지만 있다면 해봄직하다"고 말했다.
노동법원을 준비하는 작업에 대해서도 "법원의 절차 등을 최대한 간소화해 운영하면 되지 않겠냐"며 "일단 노동법원이라는 이름을 갖되 노동위원회와 비슷하게 운영해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동법원의 영역은 어디까지? "기존 체계 근본적 변화 불가피…신중히 검토해야"
물론 노동법원을 신설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다. 가장 큰 문제로 노동법원이 다룰 사건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냐가 관건이다.
예컨데 윤 대통령이 주목한 임금체불 수준으로 노동법원의 업무를 좁힌다면 기존 노동위원회보다 비효율적인 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 특히 윤 대통령의 주장처럼 '원트랙'으로 체불 사건을 다루면 형사처벌에 대한 판결을 먼저 내린 뒤에야 민사상 체불 임금이 배상될 수 있어 노동위원회보다 결론이 더 늦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노동법원의 범위를 넓히자면 이른바 '노동법'의 범주를 넘어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노사 쟁의 과정에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을 어긴 혐의나, 노조가 사업장을 점거해 형법상 업무방해 혐의를 받은 사건들,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전교조·전공노에 내려졌던 정부의 법외노조 처분과 같은 사건까지도 다루자면 노동법원이 관장할 영역이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
이 경우 당장 주무부처인 노동부가 관할하는 법령을 중심으로 살펴봐도 기존의 노사 분쟁 해결 체계를 전면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비단 노동위원회 뿐 아니라 산업재해, 고용보험 관련 심사위원회들과의 업무 영역까지 조정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노동법원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경우 그동안 노동부 산하기관은 물론 인권위, 권익위 등까지 흩어졌던 노동사건 관련 절차를 하나의 사법기관으로 일원화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권리를 구제받을 길이 더 뚜렷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 '검사 출신' 윤 대통령의 배경을 감안하면 모든 노사분쟁을 검사가 진두지휘한다는 측면에서 우려가 나올 수도 있다.
세부적으로는 노동 사건을 신속·정확하게 다룰 역량을 갖춘 법관을 준비하는 일도 쉽지 않다. 노동법원에 한해 노무사가 변호사처럼 소송을 대리할 수 있도록 하느냐를 놓고도 관련 업계의 신경전이 첨예하다.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승욱 교수는 "대통령의 구상은 지금까지의 노동 분쟁 해결 시스템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며 "자칫 졸속으로 입법되지 않도록 아주 신중하고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신여자대학교 법학과 권오성 교수는 "임금체불 등의 경우 과태료·과징금 등 행정적 제재가 강화돼야 하는 것이지, 노동법원이 설치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행정적 제재를 포함한 다층적 제도설계가 필요하지, 노동법원 설치가 급하지는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담당 판사의 자격 등 헌법적 차원에서도 논의할 부분이 있다"며 "이름뿐인 노동법원은 현재 사법시스템과 차이가 없다"고 내다봤다.
김유선 이사장도 "임금체불 문제만 해도 정부가 사업주를 대신해 지급하고 추후 사업주에 구상하는 체당금 제도의 요건이 상당히 까다롭다"며 "이런 제도의 운용 폭부터 확대하는 것이 오히려 1차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