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들기]밀리언셀러 음반 범람…판치는 상술 속 오염된 '신뢰'

지난달 29일 발매된 세븐틴의 스페셜 앨범 '세븐틴 이즈 라이트 히어'가 일본 시부야 거리에 버려져 있는 모습. 트위터(X) 캡처
554만 6930장(세븐틴 미니 10집 'FML'), 524만 6998장(스트레이 키즈 '★★★★★'), 480만 7288장(세븐틴 미니 11집 '세븐틴스 헤븐'), 399만 2703장(스트레이 키즈 '락스타'), 336만 9118장(엔시티 드림 'ISTJ'). 2023년 써클차트 앨범 부문 1~5위 판매량을 나열한 것이다.

2019년만 해도 연간 음반 판매량(써클차트 1~400위, 이하 동일 기준)은 2509만 5679장이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4170만 7301장, 2021년 5708만 9160장, 2022년 7711만 7892장으로 매년 급상승했다. 지난해에는 1억 1577만 8266장으로 정점을 찍었다.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이 연달아 음반을 내면서 발매 일주일(초동) 및 총판매량 경쟁이 극심해졌다. 100만 장 넘게 팔린 음반도 34장이나 된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3월 발표한 팬덤 마케팅 관련 소비자 인식 조사에 따르면, CD로 음악을 듣는다는 응답률은 5.7%에 불과했다. 더 이상 CD로 음악을 듣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음반이 이렇게나 '많이' 팔렸을까.

소장 가치 높인 '굿즈' 개념 가까워져…'기록 경쟁'도 치열

2020년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오프라인 팬 경험에 제한이 생기자, 그 수요가 음반으로 옮겨갔다는 분석이 중론이었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그간의 공연 수요가 음반 시장으로 몰려와 판매량이 급증했는데 (코로나 종식 후에도)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그사이 글로벌 팬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바라봤다.

음반의 용도가 '음악 감상'을 넘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굿즈'(기획 상품, MD라고도 한다) 개념으로 바뀐 점도 주된 요인으로 거론됐다. '음반의 굿즈화'는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아이돌 그룹 악수회 참가권, 아이돌 그룹의 활동 여부를 가르는 투표권 등을 이유로 수백 장의 앨범을 사는 일이 벌어진 바 있다.

아이돌이 K팝 시장의 중심이 되면서 음반 구성품은 날로 풍성해졌다. 초기에는 음원이 수록된 CD와 가사지, 사진 몇 장 정도로 단출했지만 이후 포토카드, 두툼한 화보, 엽서, 책갈피, 스티커, 폴라로이드 등 내용물이 많아졌다. 일반적인 포토북은 물론 다양한 패키징을 선보이거나 굿즈와 결합한 한정판, 과거 CD를 연상케 하는 쥬얼 버전, 부피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한 키트 앨범, 네모 앨범, 플랫폼 앨범 등 '형태'의 가짓수도 늘어났다.

차우진 음악산업평론가는 "미국에선 음반 판매량이 점진적으로 줄면서, 음반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푯값도 저렴한 편이었던 '콘서트'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음반이 안 팔리는 걸 콘서트 티켓값을 올려 파는 것으로 상쇄하고자 한 셈이다. 콘서트가 라이브 경험을 재현하는 쇼로 고도화된 계기다. 반면 K팝은 음반을 '팔리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랜덤 포토카드, 사인회를 걸고 패키징도 개성 있게 꾸미는 등 재미있게 즐기는 굿즈처럼 풀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팬들이 만든 포토카드 리스트. 트위터(X) 캡처
포토카드의 등장은 위력적이었다. 무작위(랜덤)여서 솔로가 아닌 그룹의 음반은 원하는 인물의 포토카드가 나올 때까지 여러 장 사는 행태가 빠르게 자리 잡았다. 13명인 세븐틴이나 20명 이상인 NCT처럼 멤버 수가 많아도, 포토카드는 거의 1장만 들어 있다. 원하는 포토카드를 뽑을 확률이 낮으니,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이 구입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불확실성을 무기로 소비자에게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하는 기획사의 전략이 통했다.

강혜원 성균관대학교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초빙교수는 지난 2일 문화연대 주최 토론회 '하이브-어도어 경영권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 중심의 콘텐츠 산업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획사가 팔고자 하는 수많은 상품 중 하나인 실물 음반도 '종수 늘리기'를 거듭하며 규모를 키워왔다. 그는 "많은 상품을 팬덤이 소비하게끔 하는 전략을 (기획사는) 많이 만들어왔고, 이는 곧 코어(핵심) 팬을 만드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팬들이 '자진해서' 음반을 '많이 사는' 이유는 또 있다. 음반 판매량은 명료하게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수치는 곧 음악방송 1위, 시상식 수상 가능성을 가르는 주요 지표로 활용된다. 컴백을 앞둔 시기, '신기록'을 위해 조직화·고도화된 '공구'(공동구매)에 참여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살 것'을 독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팬덤이 공유하는 방향성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K팝 팬 단체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 지구를 위한 K팝)이 올해 3월 진행한 'K팝 팬들이 한 컴백에 5장 이상 앨범을 구매하는 이유' 설문조사(총 1만 1326표) 결과를 보면, '모든 종류의 포카/앨범을 모으기 위해서'가 34.2%로 가장 높았고 '팬 사인회·쇼케이스 이벤트 참여를 위해서'가 30%로 2위였다. 근소한 차이로 3위가 된 답변이 바로 '최애(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초동 기록을 올려주기 위해서'로 27.8%였다. '차트를 올려 음방/시상식에서 상을 주기 위해서'라는 응답도 8.1%였다.

앞서 인용한 한국소비자원 조사(총 500명, 중복 응답)에서 음반 구매 목적을 살펴본 결과, 1위는 '음반 수집' 75.9%(305명)였다. 2위는 '음악 감상' 66.7%(268명), 3위는 '굿즈 수집' 52.7%(212명), 4위는 '이벤트 응모' 25.4%(102명)로 집계됐다.


기획사 대표의 공개 언급,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른 '상술'

지난달 25일 열린 기자회견 당시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랜덤 포토카드' '팬 사인회를 통한 음반 밀어내기' 등 K팝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공개 비판했다. 박종민 기자
"업계에서 랜덤 카드 만들고 밀어내기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 알음알음 다 하고 있거든. 이게 도대체 뭐 때문에 수치가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시장이 비정상적이 돼, 그리고 나중에는요. 주식시장도 교란돼요. 왜냐면 살짝 (판매량이) 꺾일 수도 있고 유지될 수도 있는데 계속 우상향이잖아요. 그리고 그거 다 팬들한테 부담이 전가돼, 럭키드로우(행운권 뽑기)로 소진해야 되지, 팬 사인회도 해야 하지. 연예인도 너무 힘들어요. 팬 사인회 계속해야 하잖아. (…) 이거를 우리 멤버들이 기죽을까 봐 갔던 애들이 또 가고 또 가고 앨범 또 사고 또 사고 이게 다 뭐야. 저는 지금 음반 시장이 너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경영권 탈취'를 시도·실행했다는 이유로 하이브(HYBE)로부터 해임 요구를 받는 민희진 어도어(ADOR) 대표는, 본인을 향한 의혹을 해명하고자 한 기자회견에서 '랜덤 포토카드' '팬 사인회 개최를 통한 앨범 밀어내기' 등 K팝 업계의 '관행'을 공개 비판했다.

사실 민 대표 발언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K팝 팬이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공감할 고질적인 문제다. 숱한 밀리언셀러가 탄생하는 성과는 강조해도 부작용과 한계는 굳이 말하지 않았던 엔터업계에서, '발언권을 가진' CEO가 직접 '문제'라고 저격했기에 화제가 됐다.

박희아 대중문화 저널리스트는 "엔터사도 기업이기에 사익을 추구하고, 벌어들인 돈을 다시 아티스트에게 쓰는 구조이기에, 랜덤 포토카드나 럭키드로우 등 다양한 수익화 방법을 팬들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런 구조를 대형 기획사가 주도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민 대표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편 팬들에게 부담을 전가한 잘못을 시인하는 내부 고발에 가깝다. '음반 인플레' 관련 발언이 특히 지지를 얻은 것도 이런 배경이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처음 포토카드가 등장한 2010년대보다, 지금의 음반 시장이 더 소비자의 '과도한 구매'를 촉진하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재편됐다. 멤버 전원의 개별 표지 음반을 포함해 동일 음반의 포장 형태가 훨씬 많아진 지 오래고, 포토카드 외에도 음반 판매처별로 달라지는 '미공개 포토카드'(미공포)까지 등장했다. 앨범 내 포토카드와 미공개 포토카드 종수를 합치면 수십 장은 예사고, 100장을 넘기는 일도 흔하다. 앨범을 전체 멤버 수만큼 사면 멤버별로 1장씩 미공포를 증정해 중복을 막는 판매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음반 구입을 요구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음반 판매처에서 미리 사 둔 물량을 소진하고자 소위 '무한 팬싸'를 진행하는 것 역시 K팝 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컴백 활동은 1~2주에 불과한데 그다음 앨범이 나온 이후에도 기존 앨범 팬 사인회를 하고 있더라, 한 앨범 팬 사인회 스케줄만 수십 회더라 류의 팬 후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지난해 발매된 NCT 2023 단체 앨범. 참여 멤버 수에 맞춰 표지가 20종으로 구성돼 있다. NCT 공식 페이스북
가요 관계자 A씨는 "소속사에서도 상술인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음반사를 통해 사입한 음반을 털어내기 위해 팬 사인회를 여는데, 어떤 그룹은 공백기 상당 부분을 기존 앨범 팬 사인회에 할애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많아진 팝업 스토어도 결국 앨범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행사로, 보통 음반사를 끼고 하기에 음반사끼리도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는 "어떤 의미로는 '파는 방식'을 새롭게 찾아낸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너무 놀랍다. 대단한 마케팅 능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라면서도 "지속가능성에는 의문이 든다"라며 "내부의 문제의식이 드러나고 있고, 팬들 자체도 피로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판매량이) 유지될지 몰라도 무한정 계속될 것인지는 돌아볼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많은 기획사가 공공연하게 하는 실적 줄 세우기, 확률형 상품 전략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이 K팝 팬덤 내부에 존재한다"라며 "코어 팬덤의 몰입적 소비가 온전히 팬덤에 의한 것인지, 시장 또는 자본의 요구이지는 않았나 돌아봐야 한다"라고 짚었다.

'팬덤 쥐어짜기' 지속 가능성 작아…기획사의 '책임 있는 태도' 필요

음반 판매 호황은 기획사 실적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업계 1위' 하이브의 최근 3년간 음반·음원 매출액(모두 연결 기준)은 2021년 3769억, 2022년 5520억, 2023년 9705억으로 줄곧 성장했다.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30.01%, 2022년 31.08%, 2023년 44.56%였다.

SM엔터테인먼트는 2022년에 음반·음원 매출액이 줄어들었으나 2023년에 회복해 상승 추이를 유지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매년 꾸준히 상승했다. SM은 2021년 2988억, 2022년 2798억, 2023년 3175억, JYP는 2021년 1127억, 2022년 1747억, 2023년 2627억 순이었다.

대형 아이돌 그룹의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신기록이 뒤따랐던 지난해에 비하면, 올해는 다소 주춤한 모양새다. 지난 8일 발표된 대신증권 리포트에는 아이돌 그룹의 전작 대비 발매 첫 주 판매량 추이가 기획사별로 나타나 있는데 전반적인 감소 추세였다.

지난 2022년 4월,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앞에서 케이팝포플래닛이 '죽은 지구에 케이팝은 없다'라며 실물 음빈 소비 문화 개선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김수정 기자
한터차트와 대신증권 리서치 센터 자료에 따르면, 최신 앨범 판매량이 직전 앨범 대비 각각 50%(있지), 40%(엔믹스), 21%(르세라핌), 33%(NCT 드림), 31%(투모로우바이투게더) 감소했다. 예시 중 전작보다 최신작이 더 많이 팔린 경우는 트와이스(66%)가 유일했다.

임수진 대신증권 연구원은 "음반 판매량의 감소는 더 이상 중국 공구 물량 감소 때문은 아니라는 결론"이라며 "과거 소수 팬덤의 대량 음반 공구 등 음반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팬덤의 움직임이 크게 줄어든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써클차트의 김 위원도 "올해 음반 차트 상위권이 비교적 대동소이하게 유지된다면, 중하위권 데이터가 많이 빠진 편"이라며 "연간 판매량 전망치를 1억 장으로 줄였다"라고 말했다.

지나친 거품으로 인해 음반 판매량이 지닌 신뢰도와 권위의 하락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가요 관계자 A씨는 "예전에는 뮤직비디오 천만 뷰 이런 것도 다 보도자료로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프로모션을 돌려서 조회수를 늘린 것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서 홍보하기 애매해진 측면이 있다. 음반 판매량에도 허수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게 됐으니, 이제 메리트가 있는 지표만으로 보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차 평론가는 "2024년 현재 기준으로 앨범 판매량이 왜곡됐거나 오염됐다는 건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상식이다. 10년 전 앨범 판매량에도 허수가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조직적인 구매와 일상화된 구매 독려는 없었다. 당연히 20년 전에는 더 믿을 만한 숫자였을 것"이라며 "앨범 파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앨범 판매량 기준으로 'K팝 성장'을 측정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게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공급자'인 기획사의 태도 변화와 관행 개선이 필요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차 평론가는 "기획사-아티스트-팬이 만드는 산업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구도가 됐다. 앨범 인플레이션은 파는 방식의 문제로 봐야 한다. 단순히 팬들이 많이 사니까 문제라고 할 게 아니라, 수익을 내는 회사가 책임지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듯하다.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은 그냥 장사꾼으로 남을 것이다. 새로운 가치에 주목하고 팬들과의 상생을 실현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새 시대의 제작자로 등장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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