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며 한껏 몸을 낮췄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더 받겠다고 나서는 등 '불통'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한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다. 다만 내용면에서는 일부 진전된 부분이 있지만, 야당과의 협치나 의료개혁 등 주요 현안에서 구체적인 해법은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가진 95분 간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국정 운영 성과와 구상, 현안에 대한 입장 등을 밝혔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2022년 8월 취임 100일 회견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먼저 오전 10시 집무실에서 발표한 '국민보고'라는 제목의 대국민 담화에서 "요즘 많이 힘드시죠"라며 "민생의 어려움이 쉬이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습니다"라고 민생고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또 "저와 정부부터 바꾸겠다", "국회와 소통과 협업을 적극 늘려가겠다", "저와 정부를 향한 어떤 질책과 꾸짖음도 겸허한 마음으로 더 깊이 새겨듣겠다" 등 발언하며 자세를 한껏 낮췄다.
담화에서 지난 2년의 성과 설명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3분의 2는 향후 3년 간의 국정 운영 방향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그동안 지적을 받은 '자화자찬'을 최대한 자제하고 향후 국정 운영 설명에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된다. 22분간 이어진 담화에서 '국민'은 24번, '민생'은 14번 언급하며 민심에 한층 더 다가가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윤 대통령은 출입 기자들에게 "오늘 질문 준비를 많이 하셨습니까.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질문을 충분히 받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쏟아지는 질문들을 들으며 미소를 띠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기도 했다. 답변 어조는 차분했고, 일부 질문에 답변한 뒤에는 "또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냐"고 되묻기도 했다.
총선 패배 원인을 묻는 첫 질문에는 "그동안 국정운영을 해온 것에 대해 국민들의 평가가 '좀 많이 부족했다' 이런 것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어 "국민들께서 체감하는 변화가 많이 부족했다"며 소통 강화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질의응답이 70여 분간 진행된 시점에서 사회를 맡은 김수경 대변인이 "충분한 시간을 드리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이 정도로 줄이겠다"고 마무리를 하려고 하자, 윤 대통령은 손을 내저으며 "한두 분만 더 (질문)하시죠"라며 회견을 이어가기도 했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올해 초 KBS 대담보다는 자세나 답변, 소통 의지 측면에서는 달라진 모습이 보인다"라고 밝혔다.
회견에서는 일부 진일보한 발표도 있었다.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는 부처인 '저출산대응기획부'(가칭)를 부총리가 이끄는 조직으로 신설할 계획을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부처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력이 필요한 상태다.
관심을 끌었던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쳐드린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있다"며 취임 후 첫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올해 초 KBS와의 대담에서 관련 질문에 "아쉽다"고 답한 것보다는 진전된 입장이라는 평가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이번 사과 발언은 사전에 준비되지 않았고 현장에서 직접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우선 성과라면 김 여사 관련 사과를 명시적으로 한 것"이라며 "또 그동안에는 '자유'를 많이 말했는데 기초 연금 40만 원, 물가 관리 등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라고 분석했다.
'낮은 자세' 불통 이미지 해소 노력…현안 구체적 해법은 '아쉽다'
여야 대치 정국의 뇌관인 특검에 대해선 '거부' 의사를 밝히며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김 여사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 대해선 전임 정부부터 이뤄진 수사가 사실상 윤 대통령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혐의점이 나오지 않았는데 특검을 추진하는 건 '모순'이며 '정치 공세'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에 속도를 내기로 한 만큼 검찰 수사를 먼저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주요 현안인 '채 상병 사건'에 대해선 철저한 진상 규명을 강조하면서 수사 당국의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수사 결과를 보고 만약에 국민들께서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 안 된다'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면서 수사 결과를 토대로 '조건부 수용' 가능성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야권의 공세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특검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선 여론 설득을 위해 좀 더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이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 원장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기자회견이었지만, 지금은 엄중하고 힘든 시기"라며 "좀 더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입장을 밝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라고 밝혔다.
외교 측면에서도 주요 현안인 한중 관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미국 대선에서 정권 교체 시 한미 관계 변화를 전망하는 견해에 대해 "한미의 탄탄한 동맹관계는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고, 한일 관계와 관련해선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서로 충분히 신뢰하고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가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한미일 외교의 반작용으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된 점은 우리 외교의 '숙제'로 꼽히지만 이렇다 할 해법은 제시되지 못한 셈이다.
윤 대통령은 주요 현안인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서도 추진 의지를 재차 강조했지만 의정 갈등이 장기화되는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해법은 아쉽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어느 날 갑자기 의사 2천명 증원이라고 발표한 것이 아니라 정부 출범 거의 직후부터 의료계와 이 문제를 다뤘다"며 "의료계는 통일된 의견이 나오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이 대화의 걸림돌이고 의료계와 협의하는데 매우 어려웠지만 마냥 미룰 수는 없다"고 말했다. 회견 이후 의료계는 의대 증원 절차를 멈추고 원점에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반응을 내놓으면서 갈등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박창환 정치평론가(장안대 교수)는 "의료개혁도 전향적인 부분이 없다"며 "국민 궁금증이나 불안함을 해소하는데 역부족이었다"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