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27·서울시청)은 최근 2시즌 연속 '크리스털 글로브'를 수상한 에이스다. 지난 2022-2023시즌 제정된 '크리스털 글로브'는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대회(1~6차) 남녀 종합 1위에게 주는 상이다. 초대 챔피언 박지원은 지난 시즌에도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과정이 쉽지 않았다. 2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만난 박지원은 정상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올 시즌이 유독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박지원은 "선배들이 위에서 지키는 게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더 많이 준비했다"면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직접 받아들이니까 그 과정이 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어느 때보다 배움이 좀 더 많은 시즌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2시즌 연속 '크리스털 글로브'를 차지하며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선 박지원이다. 그는 "세계 1위가 된다는 건 너무 원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원했을 거라 생각한다"면서 "내가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쁜 시즌이었던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박지원은 타이틀 방어를 통해 "경기에 대하는 자세,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위에 있으면 견제가 많이 들어올 것이고, 모두에게 이기고 싶은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레이스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면서 "부담을 이겨내고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큰 배움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시즌 후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온전히 경기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박지원은 "(보완할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인 것 같다"면서 "내가 체력이 좋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레이스에서 모든 기술을 펼치려면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젊은 선수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려면 그만한 체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박지원은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열린 2023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00m와 1500m를 석권하며 한국 쇼트트랙의 자존심을 지켰다.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중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2023-2024시즌 국가대표 자동 선발권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2024 세계선수권에서는 황대헌에게 잇따라 반칙을 당해 1000m와 1500m 2연패에 실패하며 국가대표 자동 선발권을 놓쳤다. 당시 박지원은 황대헌의 반칙으로 펜스에 강하게 부딪혀 목과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 여기에 박지원은 지난해 10월 ISU 월드컵 1차 대회 남자 1000m 2차 레이스 결승에서도 황대헌의 반칙으로 우승이 무산됐다.
억울하게 국가대표 자동 선발권을 놓친 박지원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팬들이 많았다. 하지만 박지원은 "워낙 경쟁이 심해서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면서 "부딪힘이 있었지만 내가 금메달을 못 딴 건 사실이기 때문에 선발전을 준비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상황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되돌아봤다.
박지원은 황대헌과 연이은 악연 탓에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지난달 초 열린 1차 선발전에서도 남자 500m 준결승에서 황대헌과 충돌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최근 반년 사이 황대헌과 무려 4차례 충돌한 것. 그럼에도 박지원은 남은 경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둬 1위로 태극 마크를 따냈다. 반면 황대헌은 잦은 반칙 등으로 부진한 모습으로 11위에 그쳐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논란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선수는 선수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선수는 운동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고, 다른 부분에 집중하면 경기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없다"면서 "나는 아직 선수이기 때문에 선수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거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박지원 입장에서는 황대헌과 지독한 악연 탓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터. 다행히 지난달 22일 황대헌이 박지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서 '팀 킬' 논란을 잠재웠다.
박지원은 "황대헌 선수가 먼저 찾아와서 진심으로 사과했고, 나는 (사과를) 받은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봤을 때 함께 더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라면서 "후배들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더 열심히 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박지원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준 건 소속팀 서울시청의 윤재명 감독이었다. 박지원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매우 많다. 특히 세계선수권이 끝나고 선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님께서 옆에서 많이 도와주셨던 것 같다"면서 "심적으로 케어를 많이 해주셨는데, 스포츠에서 피지컬도 중요하지만, 멘털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뒤늦게 꽃을 피운 박지원은 "실패가 중요한 경험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많은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작은 굴곡도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선수 생활이 굉장히 울퉁불퉁한 편이었지만, 실패가 쌓이면서 단단해지고 평평한 땅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운이 따르지 않은 순간에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 있었다. 박지원은 "운은 정해져 있다고 본다. 당장 내게 오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따라줄 거라 생각했고, 운이 따를 때 내가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서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고, 언제 한 번 나도 모르게 찾아올 운을 위해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씨익 웃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순간에는 아쉬움 대신 부족한 부분을 찾았다. 박지원은 "당시 아쉬움이 컸지만, 선발전을 마치고 선수촌에 가서 그 선수들을 보니까 나보다 좋은 선수라는 걸 느꼈다"면서 "몸으로 느끼다 보니까 빠르게 인정하게 됐고, 더 편하게 응원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2026 동계올림픽에 대한 각오도 마찬가지다. 박지원은 "올림픽은 정말 꿈 같은 무대다. 그래서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면서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올림픽 출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꿈은 이뤄졌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좋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선수답지 않은 소박한 꿈이다. 박지원은 "지난 두 번의 올림픽을 정말 간절하게 준비하며 큰 꿈을 꾸었는데, 간절함만 갖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것 같다"면서 "지금은 1위를 하고 싶다는 욕심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레이스에 임하려고 하다 보니까 부담감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박지원은 이어 "1위를 하려고 하면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면서 "물론 1위를 하면 좋겠지만, 1위를 해야 한다는 목표보다는 경기에 들어가서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모두 하고 나오겠다는 목표를 갖고 경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레이스 자체를 즐기겠다는 각오다.
끝으로 박지원은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팬들에게) 매번 많이 받기만 하는 것 같다. 많이 드리고 싶은데, 드릴 수 있는 게 경기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면서 "지금처럼 응원해 주시면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