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제공자들의 전속성 요건 폐지 이후 정부가 첫 산업재해 '성적표'를 내놓은 가운데, 화물차주·배달기사들의 위험한 노동 조건이 전면에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도로 위의 노동자들을 위한 산업안전 대책 마련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새로 부각된 산재사망사고 위험지대, '운수·창고·통신업'과 '사업장 외 교통사고'
고용노동부가 지난달(4월) 30일 발표한 '2023년 유족급여 승인 기준 사고사망 현황'을 살펴보면 일하다 사고로 숨진 사망자는 전년보다 62명 줄어든 812명이었다.'사망사고 만인율', 즉 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비중은 0.39‱를 기록했다. 그동안 0.4~0.5%대에 머물던 만인율이 0.3%대로 들어선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통계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운수·창고·통신업'과 '사업장 외 교통사고'다.
그동안 산재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대표 업종으로는 단연 건설업과 제조업이 꼽혀왔다. 이번 통계에서도 전체 산재사고 사망자 가운데 43.8%가 건설업, 20.3%가 제조업에서 발생해 두 업종을 합치면 64%를 넘는다. 그 뒤를 이은 서비스업(17.2%), 운수·창고·통신업(13.7%)과의 격차도 여전히 크다.
주목할 곳은 업종별 증감 추이다. 건설업(-46명)과 제조업(-19명), 서비스업(-10명) 모두 전년보다 사망자가 줄어든 반면, 운수·창고·통신업은 오히려 7명 늘었다.
사고사망 유형에서는 변화가 더 두드러진다. 그동안 늘상 '3대 다발 유형'으로 꼽히던 '떨어짐-끼임-부딪힘' 가운데 떨어짐(35.2%), 끼임(10.8%)는 여전히 1, 2위를 기록했지만, 부딪힘(8.5%)을 제치고 '사업장 외 교통사고'(10.6%)가 사상 처음으로 상위 3대 재해 유형에 들어섰다.
이 경우에도 떨어짐(-36명), 끼임(-2명), 부딪힘(-23명)은 감소한 반면, 사업장 외 교통사고 유형은 사망자가 전년보다 9명 늘었다.
목숨 걸고 일하는 화물차주·배달기사들, 이제야 통계에 잡혔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해 7월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종사자, 이하 특고)의 전속성 요건이 폐지되면서 특고·플랫폼 노동자들, 특히 그 중에서도 화물차주나 배달기사들이 산재보험의 보호망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전속성 요건'은 정부가 한 사람이 얼마나 산재보험에 가입할 만한 '근로자'에 가까운 사람인가 판단하는 요소다. 과거 2008년 특례조항을 통해 특고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에 가입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들 역시 일반 임금노동자처럼 하나의 사업장에서 꾸준히 일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러 업체에 동시에 등록해 일감을 받거나, 부업으로 일하는 특고·플랫폼 종사자들이 급증하면서 논란이 됐고, 결국 2022년 전속성 요건을 폐지하도록 산재보험법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2022년 7월 곡물 등 특정 품목 운송화물차주를 포함한 3개 특고 업종이 우선 산재보험을 적용받기 시작했고, 이어 지난해 7월 법 개정에 따라 특고·플랫폼 종사자들이 산재보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이처럼 산재보험 대상이 확대되면서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그동안 산재 관련 통계에 잡히지 않던 특고·플랫폼 종사자 중에서도 운수업종을 중심으로 안전 문제가 부각될 것으로 예상해왔다.
실제로 업종별로 사고사망만인율을 보면 운수·창고·통신업은 0.99‱로, 건설업(1.59‱)에 이은 2위인데다, 3위인 제조업(0.41‱)의 2배를 넘는다. 이처럼 산재사망사고가 잦은 운수·창고·통신업 사망자 중에서도 3명 중 2명(69.4%)이 사업장 외 교통사고로 숨졌다.
산재보험 적용범위가 확대돼 새로 통계에 들어온 노무제공자인 사고사망자가 83명인데, 이 가운데 '퀵서비스 기사'(38명, 45.8%)와 화물차주(22명, 26.5%)가 1, 2위를 기록했다. 결국 화물차주, 배달기사들이 산재사망사고의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노동부 관계자도 이번 통계에서 운수·창고·통신업이 부각된 이유로 "화물차주가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의미"라며 "그동안 전속성이 있는 화물차 운전사만 포함됐는데, 지난해 7월 전속성이 없는 분들도 포함되면서 통계에 잡히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최명선 노동안전보건실장도 "해외에서도 운수·창고·통신업은 사망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 업종"이라며 "그동안 고용 형태 때문에 통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서울사이버대학교 안전관리학과 강태선 교수는 "이번 2023년 산업재해 사망사고 통계는 우리나라에서 노무제공자, 특고까지 포함한 산업재해 통계의 시작으로, 그 출발점에서 만인율이 0.39‱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며 "운수업에서 워낙 많이 숨지기 때문에 전체 통계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이토록 산재 위험에 노출된 화물차주, 배달기사들이 통계에 들어왔는데도 만인율이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한 일은 그만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후로 다른 업종에서 안전보건 문제가 개선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있던 '안전운임제'도 폐기한 정부…도로 위 노동자 지킬 대책 있나
문제는 새롭게 부상한 화물차주, 배달기사들에 대한 정부의 보호대책이 여전히 미미하다는 점이다.
플랫폼노동희망찾기 오민규 집행책임자는 "전통 산업에서 산재 수치는 꾸준히 줄어드는데, 배달업 등 플랫폼 업종에서 벌어지는 산재는 빠르게 늘고 있다"며 "전체 만인율이 줄어드는 것보다 어느 산업에서, 어느 지점에서 산재가 늘어나는지, 이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지 면밀하게 조사하고 예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기존의 의지했던 물리적인 사업장 중심의 산업재해 예방 체계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 교수는 "정부는 사업주가 지휘·감독할 수 있다는 사업장 중심으로 산업안전을 감독했는데, 특고·플랫폼 종사자들은 사업장 밖에서 일한다"며 "사업장 울타리 밖에서는 산재를 예방할 수 없다는 정부의 믿음이 너무 오래됐고, 틀렸다는 사실을 이제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U(유럽연합)는 지난 3월 '플랫폼노동 지침'(EU Platform Work Directive) 최종타협안을 승인했다. 해당 안에는 플랫폼 기업이 플랫폼 종사자를 대상으로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것을 정부 당국이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강 교수는 "사업주가 앱 등을 통해 지휘감독하는 작업 명령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대책 역시 필요하다는 취지"라며 "반면 우리 정부는 이를 감독할 역량도 없고, 감독할 근거가 될 법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라고 짚었다.
최 실장은 "특고, 플랫폼 노동자들이 산업안전보건법 보호조항에 일부 적용을 받지만, 전면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화물노동자들이 산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내놓은 안전운임제조차 정부가 폐기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통계로는 이들의 위험한 노동 조건이 드러나는데, 관련 정책은 오히려 역주행해서 있던 안전 대책도 폐기한 셈"이라며 대책 마련을 서두르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