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재해로 숨진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세계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인 28일, 여전히 업무와 재해 간 연관성을 인정받지 못해 '보상 사각지대'에서 애태우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 사이에선 업무상 재해를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인정하거나, 재해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 과도하게 전가하는 현실을 제도 개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정부는 일부 부정 수급 사례에 집중해 '산재 카르텔' 등의 표현까지 동원하며 적발에 초점을 맞춘 접근법을 택하고 있어, 제도 취지인 '근로자 보호·직무 전념 여건 조성'으로도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3D프린터' 교육하다 희귀암 걸린 교사들…당국 "공무상 재해 인정 불가"
"박근혜 정부 때 '무한상상실' 사업 일환으로 학교에서 3D프린터를 활발히 도입했고, 사회적 관심도 많았어요. 동료 선생님은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죠. 당시에는 위험성에 대한 안내도 전혀 없었고 학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안 했죠."
한 과학고등학교 교사 A(47)씨는 2016년 3월부터 3D프린터를 수업에 활발히 활용했다. A씨는 2018년 3월쯤 꼬리뼈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2020년 무릎을 다쳐 병원에 방문했다가 한쪽만 두꺼워진 허벅지를 정밀 진단한 결과 같은 해 4월 희귀암인 '육종암' 진단을 받았다.
A씨와 같은 학교에 재직하며 10여 대의 3D프린터로 교육했던 물리 교사 고(故) 서울씨도 2018년 3월 육종암을 진단받았고, 2년 뒤 숨졌다. 또 다른 과학고에서 3D프린터를 빈번히 사용해 오던 교사도 이 암에 걸렸다. 육종암은 전체 암의 0.2%만 차지하는 희귀암이다.
이들 교사 3명은 최소 2년 이상, 하루 2~10시간 이상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최대 4~10대의 3D프린터를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모두 특이 과거력이나 가족력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에서 확인됐다.
비슷한 교육 환경 속에서 인구 10만 명당 1명 정도만 걸리는 희귀암을 앓게 된 교사들은 지금까지 업무상 재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7월 서씨의 공무상 재해 인정에 대한 재심 신청 이후 지난달 인사혁신처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재차 인정하지 않았다.
인사혁신처 결정 통보서에는 3D프린터 사용으로 유해물질에 노출된 것으로는 보이지만, 육종암은 원인 자체를 밝히기 어려운 희귀암이라 그 연결고리가 불확실하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겼다. 정부 정책과 맞물려 첨단 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이 교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근로자 보호 제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에서 희귀병에 걸려 외로운 싸움을 하는 모양새다.
'3D프린터 이용 장려' 정부, 교사 숨지자 뒤늦게 안전강화
이처럼 이들이 업무상 재해를 입은 것인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계기로 3D프린터 이용의 건강상 위험을 경계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이들 사례가 부각되자 후속 조치 격으로 정부 주도의 안전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어졌지만, 정작 희귀병 교사들 앞에는 "과학적 근거 부족"이라는 벽이 놓여있는 것이다.
3D프린터는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필라멘트를 고온에 녹여 적층하는 방식으로 입체 조형물을 만드는 장치이다. 2014년 당시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의 일환으로 학교에 3D프린터 교육을 장려했다.
앞선 여러 연구에선 필라멘트가 고온에서 녹는 과정에 유해한 미세입자와 휘발성 유기 화합물이 배출된다고 보고돼 잠재적인 건강 위해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부 연구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도 2019년 연구를 통해 환기 등 충분한 안전 조치가 없는 경우 3D프린터 이용으로 건강상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용 교사들을 계기로 위해성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2020년 8월에서야 뒤늦게 3D프린팅 이용 안전 대책 수립·추진 작업을 시작했다. 관계 부처 합동으로 그해 9월부터 10월까지 3D프린팅 이용 실태조사도 진행했는데, 3D프린팅 출력서비스기업 121개사와 교육기관 5754개교 등 총 6250곳 중 309곳(4.9%)에서 두통(634명)을 비롯한 여러 신체 영향이 경험된 것으로 조사됐다.
2020년 기준 전국 5222개교에 1만 8324개(43.45%) 3D프린터가 보급됐다가 지난해 4737개교에 1만 7966대(39.2%)로 감소했다. 보유 중인 3D프린터 가운데 실제 이용률은 28.1%(6962대)에 그쳤다. 3D프린터를 이용하는 교사는 2022년 3280명에서 작년 1748명으로 1년 사이 반토막 났다.
교육부 관계자는 "2019년까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홍보를 많이 하면서 (3D프린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가 2020년 선생님 사망 사건 이후 학교에서도 위험한 장비일 수 있겠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용률 감소에) 영향이 있을 거라 본다"고 설명했다.
육종암 진단을 받은 뒤 숨진 고(故) 서울(사망 당시 37세)씨의 아버지 서정균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3D프린터의 학교 사용을 정책적으로 강조한 정부의 책임을 언급하며 "3D프린터 신기술에 대한 위험성 검토도 없었다. 아들 죽고 나서야 (안전 가이드라인이) 나왔다"고 울분을 토했다.
서씨 사건을 대리한 권동희 노무사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3D프린터 사용을 장려했고, 선생님이 교육을 위해 활용하다가 위험 물질에 노출된 사실은 인정됐는데, 이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로 공무상 재해가 인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3D프린터와 암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연구가 돼있지 않은 상황인데 교사나 가족들에게 증명하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밝혔다.
"'근로자 보호' 재해 보상 제도 취지 맞게 개정해야"
이런 가운데 최근 정부의 산재 보상 관련 접근법은 '부정 보상 적발'에 치우치는 기류다.
정부는 지난 2월 산재보험 부정수급 특정감사 결과 지난 2년간 약 486건의 부정수급 사례를 적발했다며 제도 손질을 예고했다. 이는 국정감사 등에서 여당을 중심으로 지적돼 온 '산재 카르텔', '나이롱환자'의 실체 조사를 위해 이뤄졌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지난해 한 해 산재 인정 건수 14만 4965건의 0.3% 수준인 일부 부정 사례를 근거로 정부가 제도 자체의 문턱을 높이려 한다고 우려했다.
지난 25일 한국노총은 '산재노동자가 바라보는 산재보험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를 열고 "산재보험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험 제도로 산업현장에서 업무상 재해에 대해 신속하고 공정한 보상을 위해 도입됐다"며 "그러나 도입 취지와 달리 제도는 퇴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부정 사례 적발도 필요하지만, 근로자 보호라는 보상 제도의 취지를 보다 강화하는 방안 등도 정책적으로 폭넓게 고려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노무법인 참터 유성규 노무사는 "산재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100% 증명돼야 인정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며 "그 나라 산재보험의 역사와 제도, 재정적 여력, 노사정의 상황 등에 따라 인정 범위가 넓어질 수도 좁아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엔 역학조사 기간을 180일 이내로 정하고 이 기간을 넘기면 국가가 피해자에게 우선 보상 하는 산재보험법 개정안 등이 계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