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도화선된 '3·15' 의거…64년 지나 마침내 '진실 규명' 됐다

초등생에 구타·거짓 자백 강요한 경찰…시위 진압하려 실탄 수차례 발사도
64년 만에 '시위 참여자'로 인정받아…"감격스럽지만 너무 늦었다"
"후대가 4·19 기억했으면"…'국가폭력' 흔적 남았던 '무학초 담벼락' 복원 운동 전개

3·15의거 자료사진들. 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이승만 전(前) 대통령이 이끌었던 자유당 정권이 자행했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전국 곳곳에서 온 시민이 '대통령 하야'를 외쳤던 4·19혁명.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무색하게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3·15 마산의거는 그동안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잊혀왔다.
 
지난 2월, 이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영화 '건국 전쟁'이 영화관에 걸려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가운데 시위 당시에 미성년자였던 참여자들은 64년이 지나서야 '시위 참여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구경 갔다 합류한 3·15의거…"경찰한테 잡히면 그땐 죽는데이"


19일 CBS노컷뉴스는 4·19혁명 64주년를 맞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3·15의거에 참여했던 홍형식(당시 중3)씨와 이정모(가명·당시 초6)씨, 목격자였던 박홍기(당시 초2)씨를 만났다.
 
시위대를 따라나선 학생들은 같이 놀던 '동네 형님'을 쫓아서, 마산 시청 앞으로 시위대 구경을 나갔다가 시위대열에 합류했지만,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은 이유를 막론하고 어린 학생에게까지 폭력을 자행했다.

17일 오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만난 3.15의거 중학생 시위 참여자 홍형식(80)씨. 양형욱 기자
 
3·15부정선거가 벌어졌을 당시에 옛 민주당 마산시지부(현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인근에 살았던 홍씨는 우연히 마산 시청(현 마산세무서)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봐도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을 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구적인 소년은 아니었다고 했다.
 
"저녁 6시쯤 되니까 동네가 술렁거리고 우리 집 앞에 있는 큰 광장에 사람들이 다 모였어요. (사람들이)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떠들고 난리가 났어요. 들어보니까 '누군가 (마산)시청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서 '눈요깃거리 삼아서 한번 가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홍씨는 동급생인 박△△ 등 친구 5명과 함께 시위대 인파가 밀집했던 옛 마산시청으로 향했다. 시청 앞 도로 위에는 시청 업무 관련 문서들로 보이는 하얀 종이들이 쫙 뿌려져 있어서 마치 눈이 내린 듯한 광경이었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홍씨는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경찰들을 피해 시위대를 따라 마산 무학초등학교 앞으로 대피했다. 이날 오후 8시쯤, 시위대를 진압하려던 경찰들은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시위대를 향해 수차례에 걸쳐 발포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총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총알이 날아가는 모습, 총알이 발사될 때 불꽃이 팍 터지는 것도 봤어요. 경찰들이 총을 쏘니까 시위대가 해산하기 시작했어요.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한 2~30명 된 것 같아요"
 
홍씨와 친구들은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집 방향인 오동동으로 도망갔다. 다만 홍씨 친구 박모씨는 시위대가 도망가는 길목에 매복해있던 경찰관들에게 체포돼 열흘간 유치장에 입감됐다.
 
끝내 풀려난 박씨는 홍씨에게 유치장이 체포된 시민들로 가득해 누울 자리가 없어 앉은 채로 잠을 자야 했고, 심문하는 경찰관에게 가혹행위를 당해 온몸이 멍으로 뒤덮였다고 전했다.
 
홍씨는 "(체포 당시) 경찰관이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려서 박모씨가 바로 기절했고 눈을 떠보니 큰 트럭에 실려 경찰서로 끌려가고 있었다고 했다"며 "경찰관들은 열흘 동안 박모씨에게 '시위에 왜 참여했나',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때렸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같이 간 사람을 자백하면 경찰관들이 그 사람까지 잡아갔다. 불안해진 어머니가 경남 진해에 있는 친척 집으로 저를 피신시켰다"며 "그래서 박모씨가 풀려나기 전까지 열흘 동안 부모님이랑 떨어져 살았다"고 덧붙였다.
 

64년 만에 인정받은 '시위 참여자'…늦은 만큼 오래 기억되길


마산항 인근에 살았던 이모씨는 '동네 행님'을 따라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에 참가했다. 1960년대 마산항 일대에는 '회원동 판자촌' 등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들이 즐비했다.
 
3.15의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정모(가명)씨가 시위가 벌어졌던 구 마산시청 쪽을 가리키고 있다. 양형욱 기자

이씨는 당시에 시위에 참여했던 이유를 '가난한 사람들도 살판나는 세상'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3·15 의거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게 큰 목표가 있을 수는 없었고, 학교에서 교육받은 대로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는 어렸지만 권력에 빌붙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에 분노 같은 것이 있었다"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모습을 보니까 '불공정한 방법으로 정권이 유지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구나'를 느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모씨와 홍모씨는 4·19 혁명이 발생한 지 64년 만인 지난달 27일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3·15 의거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들은 뒤늦게라도 시위 참여자로 인정받아서 다행이라면서도, 3·15 의거와 4·19 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늦어졌다고 한탄했다.
 
이씨는 "시위 참여자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라면서도 "3·15 마산의거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데, 여태까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해 (진상규명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홍씨는 "3·15 마산의거에 북한 간첩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소리를 다음 정권에서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래서 3·15 마산의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는데도 큰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며 "우리는 나이가 어렸지만, 당시에 20대 이상인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셨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져서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씁쓸해했다.
 
3·15 마산의거 당시 무학초등학교를 다녔던 박홍기씨는 "3월 15일부터 4월 19일까지 시민 20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사망자 수가 176명"이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이승만을 영웅이라고 하던데, 광주 항쟁 때보다 많은 이들이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3·15 의거와 4·19 혁명"이라고 지적했다.
 
후대가 4·19 혁명을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뿌리'로 기억해주길 바란다던 박씨는 20년 넘게 '무학초등학교 담벼락 복원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1992년 초등학교 정문 앞에 민간 건물을 짓기 위해 경찰이 발포했던 총탄 19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문 담벼락이 허물어진 뒤부터 이 운동을 계속 전개해왔다.
 
그의 노력 끝에 지난해 4월 13일, 경남도청·경남교육청·경남도의회·창원특례시·무학초등학교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3·15 무학초등총탄교문·담장 복원 추진협의회 회의'가 첫 삽을 떴다. 박씨도 '무학초 교문담장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이 회의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씨는 "1992년에 학교가 교문 준공식을 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총탄 자국이 박힌) 담벼락이 없어졌다"며 "그래서 (3·15 의거) 40주년일 때부터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 장소가 아닌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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