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 장애 인정될까?' HIV 장애 인정 소송 국내서 처음 열려

대구 남구청, HIV 감염인 장애인 등록 신청 반려 처분
HIV 감염 장애 인정 기준 규정 없어 장애 진단서 발급 불가
법원 "HIV 감염인 장애인 인정 여부 관건…투렛 증후군 대법원 판례 취지 살펴야"

HIV 장애 인정을 위한 전국연대가 HIV 장애 인정 관련 행정소송 첫 기일인 17일 대구법원 앞에서 HIV 감염인 장애 등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소영 기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인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의 장애 인정 여부에 관한 행정소송이 국내에서 처음 진행됐다.  

17일 대구지방법원 제1행정단독 배관진 부장판사는 HIV 감염인 A 씨가 대구 남구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등록 반려처분 취소 소송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원고인 HIV 감염인 A 씨는 지난해 10월 대구 남구 행정복지센터에 장애인 등록 신청을 했지만 장애 진단 심사용 진단서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반려 처분을 통보받았다.

장애 정도 심사용 진단서는 보건복지부 고시에 따른 장애 정도 판정 기준에 따라 발급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장애 정도 판정 기준 내에 HIV 감염으로 인한 장애 인정 기준은 전혀 규정하고 있지 않아 장애 정도 심사용 진단서 발급이 불가한 실정이다.

이에 원고 측은 올해 1월 구청 측의 반려처분에 대해 취소를 청구하는 소장을 접수했다.

이후 A 씨는 HIV를 원인으로 하는 손상과 제약을 적은 의사진단서를 새로 발급 받아 지난 16일 행정복지센터에 신규 자문 신청을 했지만 이번에는 접수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의사진단서가 장애 심사용 진단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원고 측은 "구청은 원고가 장애 상태 확인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려 처분이 적법하고 적용 가능한 관련 규정 자체를 판단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며 "구청이 재차 접수를 반려한 것은 원고 장애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원고가 발급받을 수 없는 장애인 진단서만을 요구한 것이어서 구청 측의 주장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HIV 감염인에 대한 장애 등록 신청이야말로 예외적 절차 적용 대상에 부합하는 경우"라며 "피고가 원고에게 예외적 절차를 적용하지 않은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예외적 절차는 유명무실로 전락하므로 최소한 실체적 판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고 측은 "장애등록 신청을 할 때 장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을 해야 국민연금공단에 심사를 의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장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주지 않아 2차 보완을 요청했지만 기한 내 보완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려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시의 위법성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하는 것으로 구청 소관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배 부장판사는 HIV 감염인이 실질적으로 장애인으로 인정돼야 하는지가 이번 사건의 핵심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투렛 증후군에 대한 장애 등록 신청 거부가 위법하다고 판결한 대법원 판례를 예로 들며 구청 측에 형식적 답변이 아닌 구체적인 답변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2019년 대법원은 투렛 증후군인 B 씨가 장애 등록을 거부한 경기도 양평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서 정한 15개 장애유형에 해당하지 않는 투렛 증후군도 장애인등록을 할 수 있으며 이를 거부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어 "행정청은 원고의 장애가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조항에 규정돼 있지 않다는 이유만을 들어 원고의 장애인 등록을 거부할 수 없다"며 "시행령 조항 중 원고가 가진 장애와 유사한 종류의 장애 유형에 관한 규정을 유추 적용해 원고에게 장애등급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배 부장판사는 "이번 소송과 비슷한 사례인 투렛 증후군 대법원 판례는 장애인과 관련된 요건은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예시에 불과하다는 취지로 판시했다"며 "피고 측에서도 대법원 판결 취지를 살펴 관련 답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첫 소송 기일에 앞서 대구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HIV 장애 인정을 위한 전국연대(이하 HIV전국연대)는 HIV 감염 장애가 국내에서도 인정되어야 한다며 HIV 감염인의 장애 등록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신체적, 사회적, 법적 관점에서 HIV 감염인의 장애가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HIV가 치료 과정에서 여러 질병을 동반하고 고령 감염인에 대한 돌봄과 요양 지원이 전무한 실태를 꼬집었다.

또 HIV가 6개월 바이러스 미검출 상태를 유지하면 타인에게 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도 잘못된 편견과 사회적 차별, 낙인으로 HIV 감염인의 정신적 질환 발생 수치가 높고 사회적인 장애 상태에 놓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 따라 HIV 감염인은 자신의 성적 파트너에게 감염 사실을 고지해야 하는 현 상황은 감염인의 사적, 성적 관계 형성에 장애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HIV전국연대는 UN 등 국제 사회와 여러 외국에서 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도 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 국내 장애인복지법 상 장애는 15가지의 유형만 규정돼 있지만 대한의학회가 WHO의 ICF 기준을 따라 제시한 18개 영역에 장애 기준을 보면 '종양혈액장애'의 범주에 HIV감염 자체로 인한 CD4면역 장애를 포함하고 있다.

UN은 장애인 권리 협약(CRPD)을 통해 한국 정부에 HIV/AIDS 감염 장애인 등의 모든 장애를 아우르는 장애 개념을 채택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이미 UN장애인권리협약에 따라 홍콩, 영국, 일본 등은 HIV 감염인을 제도적으로 장애인으로 간주하고 미국, 호주, 캐나다, 독일 등은 법 해석 과정에서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HIV전국연대는 "이번 소송을 계기로 해외의 HIV 장애 인정 사례와 투렛 증후군과 복합부위통증증후군 등 국내 예외적 인정 조치 판례를 통해 장애에 대한 정의를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게 사회적이고 포괄적으로 해석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현 제도에서 배제된 HIV 감염장애인을 비롯해 장애 등록이 되지 못한 배제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 당사자인 A 씨는 "내 살아생전 HIV 장애 인정이 되지 않더라도 남아있는 HIV 감염인 동료(PL:People Living with HIV/AIDS)들과 지금도 투쟁 중인 장애 동지들의 삶에 함께 연대하는 것으로 내 남은 삶을 살아내겠다"며 의지를 밝혔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