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이모 그리고 엄마. 사회는 중년 여성을 그의 이름을 대신해 아줌마 내지 이모, 엄마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말들은 어느새 여성들을 '중년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게 됐다. 그런 중년 여성은 피해자가 되어서도 틀 안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정순'은 이 모든 편견과 틀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주체로 눈부시게 거듭난다.
'정순'(감독 정지혜)은 무너진 일상에서도 결코 '나다움'을 잃지 않고 곧은 걸음으로 나아가려 하는 정순(김금순)의 빛나는 내일을 응원하는 드라마로,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작품이다. '정순'으로 데뷔를 알린 정지혜 감독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겪게 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섬세하면서도 배려 깊게 그리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영화 초반에 그려지는 정순이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중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반영한다. 또 한편으로는 공장의 젊은 여성 노동자에게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말하는 등 그 나이대 여성으로서 일반적인 관점을 가진 인물, 즉 전형적인 중년 여성을 담아낸 인물로 나온다. 집 안 거실에 앉아 있는 정순의 모습 역시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풍경 안에 놓인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순이 일하는 식품공장은 세대 차이, 권위와 권력, 남성성 등이 모두 휘몰아치며 사회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이 축약된 곳이다. 여기서 여성, 중년, 낮은 지위의 노동자 등 모든 면에서 약자인 정순은 '아줌마' 내지 '이모'로 불린다.
그러나 정순이 단순히 정형화된 인물도, 틀 안에만 갇혀 있으려 하는 인물이 아님을 슬쩍 드러내는 공간도 공장이다. 노동자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약자의 위치에 놓인 공간에서 정순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권위에 저항한다.
영화에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장면 자체를 수위 높게 묘사한다든지 하지 않고, 적정선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거듭 엿보인다.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건 정순이 춤추며 노래 부르는 최초의 단 한 장면뿐이고, 이후는 보이지 않고 소리를 통해 가해자들이 영상을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후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이 경찰서에 가서 엄마의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직접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등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2차 가해와 불합리한 일들이 보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대하는 태도나 법은 가야 할 길이 멀고, 특히나 피해자가 정순과 같이 중년 여성인 경우에는 성범죄 피해자임에도 또 다른 편견과 불합리한 일들이 더해진다.
피해자가 디지털 성범죄를 겪은 후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피해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고, 자신을 여전히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수사기관도, 미디어도 '피해자 탓'을 하며 2차 가해를 할 때가 있는데 정순의 가족과 동료는 정순과 연대한다. 우리 현실이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그들의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정순'이 기존 미디어와 콘텐츠에서 보기 어려웠던 모습을 하나 더 포착해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정순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공장에 간 후 고개 숙이지 않고, 또 영상 속 노래와 춤을 재현하는 장면이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공장에 들어선 정순을 보고 고개 숙이는 건 가해자들이다.
공장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을 가장 억압했고, 또 피해자로 만들었던 가해자들 앞에 선 정순은 영상 속 춤과 노래를 재현하면서 감정을 터트린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저항하려는 분노이자 더 이상 '피해자'로만 남아 가해자들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노래의 의미 역시 정순 스스로에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다시 새롭게 설 수 있다는 희망이자 위로이자 다짐으로 변화한다.
범죄 피해를 겪으며 누군가의 악의적이면서도 비난 어린 시선에 놓였던 정순은 여성 노숙자에게 온기를 나눠줌으로써 냉정한 사회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았음을 그리고 편견에 갇혔던 그가 편견으로 타인을 바라보지 않으려 함을 보여준다. 또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갖는 편견에 얼마나 저항하고자 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틀 안에서 빠져나와 당당하게 주체로 서는 정순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는 자동차와 조수석이다. 늘 조수석에 앉아 조수석 창가를 통해 보이던 정순은 영화 마지막에서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를 통해 웃는 얼굴을 보인다. 여성성이라는 사회가 만든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피해자성을 넘어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정순의 모습은 영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 '정순'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중년 여성, 중년 여성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성을 강조하거나 피해를 재현하기 위해 2차 가해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만큼 배려 깊고 섬세하게 다가가며 우리가 현실에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끌어안지 못했는지 이야기한다.
배우 김금순은 스크린 안에서 온전히 '정순'으로만 존재하며 관객들을 정순의 내면을 이끈다. 감독의 배려 깊은 시나리오의 글들을 스크린 안에서 섬세하게 표현해 내며 살아 숨 쉬게 만든 김금순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많은 감독이 김금순 안에 숨어 있는,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매력과 빛나는 가능성을 끌어내 주길 바란다.
104분, 4월 17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