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생의 1자'
'김계생의 2자'
'김계생의 3자'
'김계생의 4자'
4·3 희생자로 공식 인정된 1만 4천여 개의 위패가 봉안된 제주 4·3 평화공원의 위패 봉안실. 이름 대신 누군가의 자녀로 표시된 위패 네개가 나란히 걸려있다. 출생신고도 채 하지 못한 어린아이 4명이 연달아 희생된 흔적이다.
위패봉안실 뒷쪽으로는 4·3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인을 위로하기 위한 비석 4천여 기가 세워져 있다. 행방불명인 대부분은 4.3사건 중 체포돼 제주와 육지 곳곳의 형무소에 수감된 후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다. 유골 한 조각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은 표석 앞에서 제사를 지내며 씁쓸한 마음을 달랜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제주에서 희생 당한 사람은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당시 제주도민 10명 중 한명 꼴로 죽임을 당했다. 집집마다 4·3 희생자가 한두 사람은 존재한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4·3의 비극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이 "제주 4·3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3만 개 이상의 사건이자 슬픔이자 원한이다"고 말한 이유다.
올레(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길)와 현무암 담장만이 남아있는 제주시 곤을동 마을. 흐드러진 벚꽃과 대조되는 슬픈 역사가 있다. 이곳은 4·3사건 당시 마을이 모두 불타 사라지고 주민들이 집단학살을 당한 '잃어버린 마을'이다.
1949년 1월 4일, '토벌대'는 70여 호로 이루어진 곤을동 마을을 포위했다. 마을은 불 타 사라졌고, 주민들은 바닷가로 끌려가 죽임 당했다. '무장대'가 곤을동에 숨어들었다고 말한 한 군인의 진술 때문이었다.
곤을동처럼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사라진 제주의 마을은 130곳이 넘는다. 특히 이 시기 토벌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참혹한 집단 살상을 행했다. 가족 중 청년이 없으면 입산자의 가족으로 몰아 집안 사람들을 '대살(代殺)' 했고, '무장대' 복장으로 함정수사를 해 총살하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5세 이하 전체 어린이 희생자 중 76.5%가 초토화작전 중인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발생했다. 또한 61세 이상 노인 희생자 중 76.6%도 이때 사망했다.
참혹한 대량 학살극의 배경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선포한 '계엄령'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를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그 책임에 미군정 수뇌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1948년 8월 한미 협정이 체결되면서 주한미군 임시 군사고문단 단장에게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경찰에 대한 작전 통제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제주 4·3은 1947년 3·1절 '통일 독립, 단독 정부 반대'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의 발포로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는 166개 기관·단체, 4만여 명이 참여한 유례없는 민·총·관 합동 총파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제주는 '붉은 섬'으로 낙인 찍힌다.
'붉은 섬'에 사는 제주시민은 총부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계엄령 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7년 7개월 간 벌어지며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지난 2000년 1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4·3특별법)'이 제정·공포되고 3년 후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보고서가 확정되며 '평화의 섬'을 향한 제주의 여정이 시작됐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해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이후 순차적으로 억울한 수형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청구, 희생자에 대한 국가보상금 지급이 시행되며 명예회복과 실질적 피해보상도 이뤄졌다. 특히 올해 초에는 4·3특별법을 개정해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법적 토대도 마련했다. 유족 보상에 관한 특별법 개정도 활발히 논의 중이다.
그러나 4·3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해방이후 격동의 한반도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제주 4·3은 '사건'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제주 4·3기념관 초입에는 아무 것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누워있다. 푯말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다짐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