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국에 배치된 공중보건의사(공보의)를 서울과 수도권 중심의 상급종합병원으로 차출하면서 농어촌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가 무기한 중단되는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보의 파견으로 인해 시·군 보건지소가 사실상 '폐쇄' 상태에 놓이면서 고령층이 절대 다수인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기초 진료권'마저 사라지게 됐다며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쩔쩔매고 아픈 사람들 많은데…" 문 닫은 보건지소
인구 2천 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인 강원 원주 귀래면. 이 곳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왔던 귀래 보건지소 공보의는 지난 11일 진료를 마지막으로 4주간 상급종합병원으로 차출됐다.
공보의가 떠난 지 8일째인 지난 19일, 기자가 찾은 귀래 보건지소 문 앞으로는 '보건지소 내과 진료 불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의사 집단행동에 따른 보건 의료 위기단계 '심각단계'로 인력이 필요한 의료기관에 공중보건의가 파견돼 진료가 불가하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보건지소에는 진료 불가 안내를 받지 못하고 찾아올 주민들을 위해 보건소 직원 한 명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혈압과 혈당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 의료기기들이 주민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료 서비스'였다.
면사무소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덕분에 지역 주민들은 민원과 의료 서비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 편리했던 의료시설이 공보의 부재로 인해 사실상 운영이 중단되자 주민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먼 거리를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할 처지가 됐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노인들의 경우 지자체나 가족의 도움 없이는 치료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평소 어지러움증으로 인해 보건지소 진료를 받아왔다는 한 주민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려고 하는데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 인천에 있는 아들이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면사무소로 향하던 한 주민은 "보건소 운영을 안 하니까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약을 못 타서 쩔쩔매고 아픈 사람이 많은데도 (진료가)안되니까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마을에서 작은 상가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근래에는 사흘만 운영하다가 이번엔 이마저도 끊겼다. 감기가 걸리던가 피부가 안 좋다고 하면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아왔는데 의사가 없으니까 너무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공보의가 정원을 채우지 못해 귀래 보건지소 공보의로부터 주 2회 순회 진료를 받아왔던 부론 보건지소도 문 앞에 안내문을 내걸고 공보의 공백으로 인한 기약 없는 휴진을 안내했다.
보건지소 관계자는 "시골은 의사 한 명이 절실한 곳"이라며" 강원도에서도 원주나 춘천, 강릉이 의료 취약 지역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시내에 국한될 뿐이며 시골을 보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정은 타 지역도 비슷한 상황. 같은 날 전북 전읍 감곡 보건지소에 지팡이를 짚고 고혈압 약을 받으러 온 할머니는 '의사가 없다'는 안내에 그저 놀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 문(91) 씨가 이곳을 찾은 이유. 63세부터 91세까지 꾸준히 먹어온 고혈압 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병원에 의사 선생님이 없다'는 안내에 문 씨는 "어찌야스까(어떻게 해야 하나) 그 약을 하루 한 봉지씩 꼭 먹여야 하는데"라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농어촌 같은 의료 취약지역에서 공중보건 업무를 맡는 의사가 없다는 소식은 문 씨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문 씨는 보건소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한 두 명 중 한 명이다. 문 씨는 "올해 91살인데 내가 너무 오래 사는가봐"라며 말끝을 흐렸다.
"의사 한 명이 절실" 떠난 공보의에 전국 보건지소 '텅텅'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건강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공보의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의사 한 명이 절실한 전국 보건지소들은 당장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정부와 각 지자체들은 최소 4주간의 차출에 당장 남은 공보의들의 '순회 진료'를 통해 의료 공백을 메꾸고 진료가 가능한 인근 진료소 안내 등 임시 방편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지역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판이 들끓고 있다.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경기 가평 보건소 내 5개 전 지소는 사실상 폐쇄 조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기 양평, 경남 함안과 산청지역의 경우 공보의 1명이 지소 3개를 맡고 있다.
강원 철원에서는 공보의 1명이 4개 지소를 도맡고 있으며 1주일에 1번씩 순회 진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북 군산과 장수는 각각 1명의 공보의가 3개 지소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지역의 경우 공보의 270명 중 현재 17명이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7명), 국립중앙의료원(6명),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 상황실(3명), 서울대병원(1명) 등 상급종합병원으로 차출됐다.
충남지역 15개 시·군에서는 공보의 17명이 차출됐으며, 전북에서는 공보의 155명 중 10명이 전북대병원 등으로 파견됐다. 경남에서는 현재까지 17명의 공보의가 차출돼 서울과 전남, 부산 등 5곳에 4주간 배치됐다.
인천은 공보의 81명 중 4명이 상급종합병원으로 파견 조치됐고, 경기도의 경우 공보의 220명 중 4명이 수도권 대형병원에 투입된 상황으로 비수도권 지역 대비 차출 수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농어촌 지역 공보의 대거 차출 이후 정부가 '순회 진료'를 통한 대처에만 급급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불만도 거세지고 있다.
충남 서천군 주민 A씨는 "가뜩이나 지역에는 병원과 의사가 부족한데 그나마 지역 의료의 마지노선인 보건소의 공보의마저 도시에서 필요하다고 빼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며 "도시민만 국민이고 농어촌 주민은 국민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계에서는 대형 대학병원에 파견된 공보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된다. 공보의가 의사면허 취득 후 바로 군에 입대한 일반의인 만큼 대학병원의 특화된 전문분야를 진료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대전권 대학병원의 관계자 B씨는 "대학병원 전문분야의 수술은 교수나 간호사 등 다른 의료진과 협력이 중요한데 갑자기 파견된 일반의 수준의 공보의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의 보여주기식 정책 발상이 아니냐"고 항의했다.
이승준 강원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병원이라는 곳은 고도의 수술을 하는 사람만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보의가)도움은 될 것"이라면서도 "다만 앞으로 이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 지방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수도권에)쏟아붓겠다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공보의 매년 '감소' 농어촌 의료 존립 가능할까
농어촌 지역 주민들의 공보의 의존도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매년 공보의 수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 도심과 농어촌 간 의료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연도별 의과 공보의 정원은 2018년 2002명, 2019년 1960명, 2020년 1901명, 2021년 1862명, 2022년 1714명으로 지속 감소했다.
수치로만 보면 5년 만에 288명이 줄어든 셈으로 지난해 배치된 강원도 공보의가 270명인 점을 감안할 때 강원지역 공보의 전체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정부가 이날 25일쯤 군의관과 공보의 250명을 상급종합병원 20곳에 추가로 투입하기로 한 가운데 이에 반발한 의대생들이 현역병 입대를 대거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태는 더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의대생 단체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최근 병역 의무가 있는 남성 의대생을 대상으로 군 휴학에 대한 자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5016명 중 49%는 올해 8월까지 현역 사병으로 입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입대 신청을 한 의대생은 419명으로 2년 전 현역병 입대한 의대생은 2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볼 때 이례적 수치다.
이성환 대한공보의협의회장은 "공보의는 지역에서 헌신하는 선생님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현역병 대비 근무 기간도 2배 이상 길고 봉급도 적다"며 "이런 부분에 있어 공보의는 언제든지 쓸 수 있다는 사람들이라는 메세지가 대외적으로 전달되면서 내년 공보의 감소는 물론 현역병 입대를 적극 고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정말 위험 수치를 넘어 공보의가 존립 불가능한 상황으로 가지 않을까라는 게 제일 큰 걱정"이라며 "현역 입대자가 100명만 늘어도 사실 공보의 유지가 어려워 진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