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의 한티 탐방…가톨릭 성지 '대변신'
잠시나마 한티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시점이 1976년부터 약 2년 동안이었고 당시는 한국 가톨릭 내부에서도 한티의 성역화를 생각지도 않던 시절이라 그곳이 '피의 순교지'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티란 지명에 '성지'란 두 글자가 덧붙여진 걸 알게된 건 2000년이 넘은 21세기에 들어서야 전언을 통해서다.
한티의 성역화가 본격화하기 전 팔공산맥 가산산성과 파계봉 사이 능선(한티재)에 대구에서 군위군 부계면으로 이어지는 2차로 국도가 먼저 뚫렸고 한티재 정상부엔 휴게소도 조성됐다. 2010년쯤으로 기억된다. 명절 연휴를 본가인 대구 칠곡에서 보내면서 한티재 드라이브 여행을 가게 됐다. 7부 능선쯤 되는 곳을 지나치는데 '한티성지'란 글이 새겨진 커다란 화강암 표석이 눈에 들어와 성지내부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국도와 거의 맞붙은 진입로의 바리케이드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티행을 포기했던 적이 있다.
한티성지로 취재에 나서기 몇일 전 예약이나 취재 편의 등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수녀님으로 추정되는 직원과 통화가 이뤄져 민간인이 살던 마을의 원형이 보존돼 있는지 물어봤다. "원래 거대한 십지가가 서 있는 십자가광장 뒤편에 교우촌이 있었지만 현재 '억새마을'로 불리는 곳으로 옮겨져 마을이 조성돼 있어요. 진짜 마을은 아니라고 봐야죠" 박해를 피해 한티로 찾아든 초기 신자들이 살았던 마을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억새마을은 초기 신도의 후손이나 외지인들이 입주해 살던 곳이다.
교우촌은 억새마을로…10여채 초가도 성역화
탐방을 시작하기 몇일 전 대구엔 비가 내렸지만 해발 높이가 1000미터를 넘는 팔공산엔 몇 일에 걸쳐 내린 눈이 온 산하를 뒤덮어 순백의 은세계였다. 지구 온난화가 한참이나 진행된 오늘날 북반구의 최북단에 가까운 그린란드 빙하 가운데 많은 부분이 녹아내리고 심지어 얼지 않는 항구가 생길 정도라곤 하지만 지구 온난화란 용어가 나오기도 전인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겨울마다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 곳이 대구다. 하물며 조선 지배세력의 박해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말엔 오지 중 오지 한티지역의 추위가 몇 갑절은 강력했을 것이다.
한티성지에는 신분이 확인된 순교자 3명을 포함해 40여명의 유해가 발굴돼 '순교자묘역'이 조성돼 있고 각 묘역마다 1,2,3.. 번호가 새겨진 십자가 모양 묘비가 서 있다. 몸서리치게 추웠을 그곳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이 가운데 신분과 행적이 밝혀진 순교자는 조 가를로, 최 바르바라, 조아기 등 3위(位)다. 이들 믿음의 선진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순교로 믿음을 지킨 40명…순교자묘역에 영면
감옥에서 당한 갖은 고문에도 믿음의 증거가 될 교회 서적을 내놓지도 누군가를 밀고하지도 않았는데 배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고문이 두려워 회심했을 수도 있고 본인 외엔 알지 못하는 종교적 계시가 있었을 수도 있다. 150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상상해볼 수 있는 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 없는 처지와 뼛속까지 새겨진다는 고문의 고통 사이에서 고뇌했을 번민에 찬 그의 모습이다.
배교의 대가는 석방이었다. 가톨릭사상지(紙)에(66호) 따르면 서태순 베드로는 석방되자 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문경의 한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사실로 미뤄볼 때 그의 배교는 복음을 저버렸다기보다는 신앙을 이어가기 위한 또다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조선시대 최악의 천주교도 학살사건인 병인박해 때 문경에서 체포된 지 5일만에 교수형을 당했다. 서태순 베드로가 한티성지와 인연이 닿은 건 가족들이 그를 한티성지로 이장하면서다. 순교한 지 145년만인 2012년 한티성지에는 그를 기리는 순교자 비석이 세워졌다.
그의 한티 생활은 비록 초근목피로 겨우 풀칠을 하고 숯을 굽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형제를 얻었고 포교에 진력하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뿐 조가를로 부부와 여동생 조아기는 흥선대원군이 보낸 관군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모두 순교했다. 그 두메산골 오지에서도 검거선풍을 피해내지 못한 걸로 미뤄볼 때 탄압의 칼날이 얼마나 서슬퍼렇고 집요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숲속으로 몸을 피했던 두 아들은 해가 진 뒤 부모와 고모의 시신을 수습하며 슬픔과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후손들은 신부로 수녀로 가톨릭 포교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졌다.
구한말 가톨릭 신도들…'한티로 한티로'
한티 골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9세기 내내 진행된 탄압기에 수도권을 이탈한 신도들이 청송 영양 등 경북북부 산간오지로 숨어들었다가 일부가 체포돼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자 가족,친척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찾아든 것이 한티 신자촌의 시작인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대목구 4대 교구장 베르뇌(S. Berneux) 주교는 "칠곡 고을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작은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는 1862년 성무보고서를 남겼다.
한티에서 순교자 유해가 발굴되고 본격 성역으로 조성되기 전인 1970년대엔 골짜기 중앙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 10여채와 민가를 둘러싼 다락논 수십마지기가 산골마을 풍경의 전부였다. 마을 뒤편으로는 팔공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초가마을 중앙길로 연결되는 마을진입로는 조그만 오솔길 하나가 전부였다. 이 진입로는 골짜기 개울 옆으로 뚫려 있다.
칠곡군 동명면~군위군 부계면으로 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한티 가는 길은 오지로 들어가는 길인 만큼이나 멀고 험했다.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 가는 16번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1대 배차될 정도로 뜸하게 다녔기 때문에 교통편이 좋지 못했고 버스종점으로부터 한티마을까지는 도보길이어서 세상과의 통행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곳의 지명이 방터골(사투리 지명은 바지마)인데 그곳으로부터 한티마을까지 약 1시간을 걸어야 한다. 자연부락 이름으로 거치게 되는 주요 지점으로 바지마와 고지터, 마당재, 마당재마을 등이 있고, 마당재마을까지가 1차 고비다. 마당재란 커다란 고개를 넘으면 서너채 쯤되는 민가가 있는 마지막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30여분 걸어야 한티마을 진입로가 나온다.
신나무골~한티 45.6km,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인기
한티 가는 오솔길은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정도로 좁은데다 왼쪽 길 섶은 빽빽한 숲과 바로 이어지고 오른 쪽은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이어서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야생산림의 한 가운데나 다름이 없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자동차로 접근할 경우 한티재길을 선택하면 한티성지 입구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50분 정도 걸린다. 평산아카데미가 있는 마당재마을로 접근할 경우 평산아카데미에서 도보로 20여분이면 한티성지에 다다른다.
한티성지의 전상규 주임신부는 지난 1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낙동강 바로 옆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 성지와 동명성당, 진남문을 거쳐 한티순교성지에 이르는 45.6km의 길은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지난 1월 혹한기에도 40명이 이 길을 찾아 완주스탬프를 찍고갔다"고 소개했다. 사단법인 한티는 "가실에서 한티까지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나를 찾는 45.6km"라고 한티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길 중간중간 완주 인증스탬프를 찍는 스팟도 마련돼 있었다. 믿음을 향한 신심과 열정,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가족도 생활터전도 행복도 초개처럼 던져버린 한티 성지인들의 숭고한 신념을 생각하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이보다 의미가 깊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한티성지 전상규 신부 "이곳서 정화되는 체험 하시길"
그곳 책임 신부의 안내대로 순교자의 묘역을 시작으로 억새마을을 탐방한 뒤 마지막으로 그 옛날 가톨릭 신자들이 걷던 그때 그길로 이어지는 한티성지 내 도보 진입로쪽을 둘러본 뒤 자동차를 몰아 바지마~마당재 쪽을 찾아갔다.
병원연수원과 평산아카데미가 들어선 마당재 마을은 포장도로가 옛 길을 대체한데다 적지 않은 수의 주택들이 새롭게 들어서 한티마을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평산아카데미 관계자에게 길을 한차례 묻고도 한동안 헤매고서야 그 길을 발견했다.
산골마을 오지 중의 오지 한티마을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떠난 그들의 확고한 신념과 숭고한 지조를 반석으로 삼아 성지로 순례지로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 대구와 영남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서 깊고 의미 있는 성소이자 관광지로 거듭났다.
※ 참고문헌 |
대구의 순교자들, 영남교회사회연구소(편). 대건인쇄출판사 1988/ 가톨릭신문 제 2811호 4면/ 대구대교구 요람으로서의 한티 교우촌에 관한 고찰. 김정희著/ 교회와 역사 中 험준한 태백줄기 한티마을. 윤광선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