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한티(大峴) 가는 길'

경북 칠곡군 팔공산 한티성지의 억새마을 모습. 이 곳은 구한말 가톨릭 탄압을 피해 숨어든 초기 신도들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억새마을은 그 후손들과 이후 외지인들이 거주했던 공간이다. 이재기 기자
영남지역 가톨릭 성지 '한티'(大峴)는 가톨릭 신자들 만큼이나 나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30여년 전 우리 가족들은 이곳 한티 골짜기로 이주했었다. 한티로의 이주문제로 심각한 가족 내 갈등을 겪었던 우리는 채 2년을 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난다. 한티로의 이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지만 이사 가는 걸 놓고 부모님이 심하게 다퉜다는 사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티란 마을이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남지 않았다. 그런 한티를 중년의 언론인이 된 뒤 다시 찾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30년만의 한티 탐방…가톨릭 성지 '대변신'


잠시나마 한티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시점이 1976년부터 약 2년 동안이었고 당시는 한국 가톨릭 내부에서도 한티의 성역화를 생각지도 않던 시절이라 그곳이 '피의 순교지'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티란 지명에 '성지'란 두 글자가 덧붙여진 걸 알게된 건 2000년이 넘은 21세기에 들어서야 전언을 통해서다.

한티의 성역화가 본격화하기 전 팔공산맥 가산산성과 파계봉 사이 능선(한티재)에 대구에서 군위군 부계면으로 이어지는 2차로 국도가 먼저 뚫렸고 한티재 정상부엔 휴게소도 조성됐다. 2010년쯤으로 기억된다. 명절 연휴를 본가인 대구 칠곡에서 보내면서 한티재 드라이브 여행을 가게 됐다. 7부 능선쯤 되는 곳을 지나치는데 '한티성지'란 글이 새겨진 커다란 화강암 표석이 눈에 들어와 성지내부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국도와 거의 맞붙은 진입로의 바리케이드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티행을 포기했던 적이 있다.

한티순교 성지임을 나타내주는 표석. 이재기 기자
2024년 3.1절 연휴 첫날 긴 세월이 흐르고서야 한티마을을 찾아 2가지에 적잖이 놀랐다. 한티성지가 한국 가톨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해도 교황청이 가톨릭 한국교구를 통해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을 추진했다곤 하지만 피정의집이나 영성관, 순례자성당 등 성역화 규모가 매머드급이었고 추억 속의 옛집이 그대로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티성지로 취재에 나서기 몇일 전 예약이나 취재 편의 등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수녀님으로 추정되는 직원과 통화가 이뤄져 민간인이 살던 마을의 원형이 보존돼 있는지 물어봤다. "원래 거대한 십지가가 서 있는 십자가광장 뒤편에 교우촌이 있었지만 현재 '억새마을'로 불리는 곳으로 옮겨져 마을이 조성돼 있어요. 진짜 마을은 아니라고 봐야죠" 박해를 피해 한티로 찾아든 초기 신자들이 살았던 마을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억새마을은 초기 신도의 후손이나 외지인들이 입주해 살던 곳이다.

억새마을의 한 초가 처마에 고드름이 달려 있다. 이재기 기자

교우촌은 억새마을로…10여채 초가도 성역화


탐방을 시작하기 몇일 전 대구엔 비가 내렸지만 해발 높이가 1000미터를 넘는 팔공산엔 몇 일에 걸쳐 내린 눈이 온 산하를 뒤덮어 순백의 은세계였다. 지구 온난화가 한참이나 진행된 오늘날 북반구의 최북단에 가까운 그린란드 빙하 가운데 많은 부분이 녹아내리고 심지어 얼지 않는 항구가 생길 정도라곤 하지만 지구 온난화란 용어가 나오기도 전인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겨울마다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 곳이 대구다. 하물며 조선 지배세력의 박해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말엔 오지 중 오지 한티지역의 추위가 몇 갑절은 강력했을 것이다.

한티 골짜기 마을이 산으로 첩첩이 에워싸인 모습 멀리 산너머가 대구시가지 방향이다. 이재기 기자

탐방에 나서기 전날 내린 함박눈에 성지구역 전체가 눈에 덮여 있다. 이재기 기자

한티성지에는 신분이 확인된 순교자 3명을 포함해 40여명의 유해가 발굴돼 '순교자묘역'이 조성돼 있고 각 묘역마다 1,2,3.. 번호가 새겨진 십자가 모양 묘비가 서 있다. 몸서리치게 추웠을 그곳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이 가운데 신분과 행적이 밝혀진 순교자는 조 가를로, 최 바르바라, 조아기 등 3위(位)다. 이들 믿음의 선진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티성지 순교자묘역 입구에 있는 십자가. 이재기 기자
아래는 태중 교우였던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의 순교 이야기다. 하나님이란 종교의 뿌리는 같지만 기독교에서는 부모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믿음을 갖게 된 경우 '모태신앙'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태중교우'로 부른다. 1868년부터 10년 가까이 전국에 피비린내를 풍기며 자행됐던 병인년의 박해 때 하늘나라로 갔으니 그는 19세기 중엽쯤 충청도 청풍지역의 가톨릭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1784년 한국땅에 가톨릭이 처음 전파된 걸 감안하면 이 분의 집안은 한국 가톨릭의 1세대에 속하는 명문 집안 가운데 하나다.

표지석 뒤쪽이 순교자묘역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재기 기자
가톨릭의 역사가 50년도 안된 시절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엄격했던 계급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이방인 내지 지배질서에 반기를 드는 세력일 뿐이었다. 19세기 내내 조선왕조에 의해, 세도를 부리던 지배계층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신자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지방관리들의 탐욕에 의해 '○○박해'로 명명된 탄압이 반복됐다. 탄압의 회오리가 몰아칠 때마다 무고한 신도들이 무참히 도륙되고 잔혹한 탄압상은 교우촌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순교자묘역에는 성지화 이후 발굴된 40위의 순교자들이 안장돼 있다. 이재기 기자
어린시절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삶을 살면서도 믿음만은 굳건히 지켜왔지만 조선 철종 연간, 경신박해의 검거선풍을 피하진 못하고 대구감영에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 버티고 버티던 그의 최종 선택은 배교(背敎)였다.

순교로 믿음을 지킨 40명…순교자묘역에 영면


감옥에서 당한 갖은 고문에도 믿음의 증거가 될 교회 서적을 내놓지도 누군가를 밀고하지도 않았는데 배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고문이 두려워 회심했을 수도 있고 본인 외엔 알지 못하는 종교적 계시가 있었을 수도 있다. 150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상상해볼 수 있는 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 없는 처지와 뼛속까지 새겨진다는 고문의 고통 사이에서 고뇌했을 번민에 찬 그의 모습이다.

배교의 대가는 석방이었다. 가톨릭사상지(紙)에(66호) 따르면 서태순 베드로는 석방되자 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문경의 한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사실로 미뤄볼 때 그의 배교는 복음을 저버렸다기보다는 신앙을 이어가기 위한 또다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조선시대 최악의 천주교도 학살사건인 병인박해 때 문경에서 체포된 지 5일만에 교수형을 당했다. 서태순 베드로가 한티성지와 인연이 닿은 건 가족들이 그를 한티성지로 이장하면서다. 순교한 지 145년만인 2012년 한티성지에는 그를 기리는 순교자 비석이 세워졌다.
 
십자가 옆으로 조성된 '한티사람들' 조형물은 전체적으로 한티순교자를 나타낸다. 크고작은 입석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교한 한티의 남녀노소 순교자를, 바닥의 둥근 돌은 칼날에 떨어진 순교자의 머리이다. 이재기 기자
신분이 밝혀진 순교자 가운데 조 가를로는 친족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다 못해 여동생 조아기를 데리고 고향 상주를 떠나 경북북부를 전전했다. 그의 최종 정착지는 맘 놓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오지 한티였다. 산 중턱이라 앞이 훤히 터져 외지인의 접근을 신속히 알아챌 수 있고 마을 뒷산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정상이라 달아나기에도 좋은 피신처로는 최적의 지형지물이었다.

그의 한티 생활은 비록 초근목피로 겨우 풀칠을 하고 숯을 굽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형제를 얻었고 포교에 진력하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뿐 조가를로 부부와 여동생 조아기는 흥선대원군이 보낸 관군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모두 순교했다. 그 두메산골 오지에서도 검거선풍을 피해내지 못한 걸로 미뤄볼 때 탄압의 칼날이 얼마나 서슬퍼렇고 집요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숲속으로 몸을 피했던 두 아들은 해가 진 뒤 부모와 고모의 시신을 수습하며 슬픔과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후손들은 신부로 수녀로 가톨릭 포교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졌다.
 

구한말 가톨릭 신도들…'한티로 한티로'


한티 골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9세기 내내 진행된 탄압기에 수도권을 이탈한 신도들이 청송 영양 등 경북북부 산간오지로 숨어들었다가 일부가 체포돼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자 가족,친척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찾아든 것이 한티 신자촌의 시작인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대목구 4대 교구장 베르뇌(S. Berneux) 주교는 "칠곡 고을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작은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는 1862년 성무보고서를 남겼다.
 
한티에서 순교자 유해가 발굴되고 본격 성역으로 조성되기 전인 1970년대엔 골짜기 중앙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 10여채와 민가를 둘러싼 다락논 수십마지기가 산골마을 풍경의 전부였다. 마을 뒤편으로는 팔공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초가마을 중앙길로 연결되는 마을진입로는 조그만 오솔길 하나가 전부였다. 이 진입로는 골짜기 개울 옆으로 뚫려 있다.

마당재에서 한티마을 이어지는 진입로. 과거에는 소로였지만 지금은 넓게 확장돼 있다. 이재기 기자
두메 산골 오지중 오지란 말이 딱 들어맞는 지형지물이다. 대구와 안동을 잇는 구안국도 대구 경계지점~한티마을까지는 20km를 조금 넘을 거리, 대구시내로부터는 자동차로 40~50분 정도 걸린다.

칠곡군 동명면~군위군 부계면으로 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한티 가는 길은 오지로 들어가는 길인 만큼이나 멀고 험했다.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 가는 16번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1대 배차될 정도로 뜸하게 다녔기 때문에 교통편이 좋지 못했고 버스종점으로부터 한티마을까지는 도보길이어서 세상과의 통행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곳의 지명이 방터골(사투리 지명은 바지마)인데 그곳으로부터 한티마을까지 약 1시간을 걸어야 한다. 자연부락 이름으로 거치게 되는 주요 지점으로 바지마와 고지터, 마당재, 마당재마을 등이 있고, 마당재마을까지가 1차 고비다. 마당재란 커다란 고개를 넘으면 서너채 쯤되는 민가가 있는 마지막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30여분 걸어야 한티마을 진입로가 나온다.  

신나무골~한티 45.6km,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인기

 
한티 가는 오솔길은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정도로 좁은데다 왼쪽 길 섶은 빽빽한 숲과 바로 이어지고 오른 쪽은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이어서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야생산림의 한 가운데나 다름이 없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자동차로 접근할 경우 한티재길을 선택하면 한티성지 입구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50분 정도 걸린다. 평산아카데미가 있는 마당재마을로 접근할 경우 평산아카데미에서 도보로 20여분이면 한티성지에 다다른다.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한티 가는 길' 가실성당 ~ 한티순교성지 까지 45.6km다. 이재기 기자
도보로 한티성지에 이르는 길은 영남지방 가톨릭의 양대 성지인 칠곡 신나무골과 한티성지 두 곳을 잇는 순례길의 끝 부분이다. 한 두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았던 오솔길은 자동차 1대는 지나다닐 만큼 넓게 확장됐고 가는 길 옆 계곡은 석축을 쌓아 하안공사를 깔끔하게 끝내 순례자들이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다. 이길을 포함해 칠곡 신나무골과 한티성지를 이은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한티가는 길'이 재정비돼 신자들의 순례길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한티성지의 전상규 주임신부는 지난 1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낙동강 바로 옆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 성지와 동명성당, 진남문을 거쳐 한티순교성지에 이르는 45.6km의 길은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지난 1월 혹한기에도 40명이 이 길을 찾아 완주스탬프를 찍고갔다"고 소개했다. 사단법인 한티는 "가실에서 한티까지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나를 찾는 45.6km"라고 한티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길 중간중간 완주 인증스탬프를 찍는 스팟도 마련돼 있었다. 믿음을 향한 신심과 열정,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가족도 생활터전도 행복도 초개처럼 던져버린 한티 성지인들의 숭고한 신념을 생각하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이보다 의미가 깊다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한티가는 길 한티골짜기 구간 들머리의 스탬프 저장소 모습. 이 지점으로부터 한티마을 어귀까지 도보로 25분 정도 걸린다. 이재기 기자
전 신부는 "(한티성지가)종교적 시설이지만 부담없이 언제든 오셔도 되는 그런 장소였으면 좋겠다"며 "이곳을 거쳐 가면서 정화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떠나가시는 그런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한티성지 전상규 신부 "이곳서 정화되는 체험 하시길"


그곳 책임 신부의 안내대로 순교자의 묘역을 시작으로 억새마을을 탐방한 뒤 마지막으로 그 옛날 가톨릭 신자들이 걷던 그때 그길로 이어지는 한티성지 내 도보 진입로쪽을 둘러본 뒤 자동차를 몰아 바지마~마당재 쪽을 찾아갔다.

병원연수원과 평산아카데미가 들어선 마당재 마을은 포장도로가 옛 길을 대체한데다 적지 않은 수의 주택들이 새롭게 들어서 한티마을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평산아카데미 관계자에게 길을 한차례 묻고도 한동안 헤매고서야 그 길을 발견했다.

한티성지 내 영성관의 모습. 이재기 기자
지금은 돌로 쌓은 축대와 더러는 콩크리트로 마감된 '한티 계곡길'을 거슬러 한티마을로 올라가던 곤궁했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그곳에서 행복했던 그 시절, 여름철엔 고된 농사일로, 겨울철엔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느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을 한국 초기 가톨릭 신도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한티가는 길의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구간. 마을 어귀에 득명동이란 자연석이 놓인 모습. 이재기 기자

산골마을 오지 중의 오지 한티마을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떠난 그들의 확고한 신념과 숭고한 지조를 반석으로 삼아 성지로 순례지로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날 대구와 영남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서 깊고 의미 있는 성소이자 관광지로 거듭났다.

※ 참고문헌
대구의 순교자들, 영남교회사회연구소(편). 대건인쇄출판사 1988/ 가톨릭신문 제 2811호 4면/ 대구대교구 요람으로서의 한티 교우촌에 관한 고찰. 김정희著/ 교회와 역사 中 험준한 태백줄기 한티마을. 윤광선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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