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3월 1일 강원CBS, 강원영동CBS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최진성의 위클리오늘> 인터뷰 내용 전문입니다.
◇ 최진성> 오늘은 3월의 첫날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날이기도 하죠. 과거의 오늘엔 일제 치하에서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부르기도 했고요, 그 밖에도 각자의 방법으로 여러 저항하며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을 겁니다. 최진성의 위클리오늘, 오늘은 3.1절을 맞아 지난해 독립 유공자로 서훈된 최인규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동해 천곡감리교회 장로이자 순국·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김형걸 장로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김형걸> 네, 안녕하십니까? 천곡감리교회를 섬기는 김형걸 장로입니다. 강원CBS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인사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 최진성> 네, 반갑습니다. 바쁜 가운데에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3.1절을 맞아 고 최인규 권사, 최인규 선생에 대한 의미 있는 이야기 우리 청취자분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요, 고 최인규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요?
◆ 김형걸> 네. 최인규 선생님은 교회에서는 최인규 권사로도 많이 불립니다. 우리 최인규 권사님은 음력으로 1880년 11월 5일 현재 동해시 송정동에서 최돈일 씨의 차남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과 성년 때는 당시에 그 같은 또래와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았는데 그가 18세에 결혼해 가지고 7년 후에 딸을 둡니다. 그렇지만 자손이 귀한 집안인데 딸을 둔 부인이 일찍 병으로 사별을 하고 좀 방황하는 생활을 하십니다.
42세 때 북평제일교회에 처음 나온 후에 1925년 북평제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시다가 1933년도에 북평제일교회에서 한 30리 떨어진 곳에 천곡교회가 봉헌을 하는데 이 교회로 이명하여 옮깁니다.
그리고 천곡교회에 열심을 다하여 교회를 섬기며 그가 가진 논밭전지 전 재산을 교회에 기증을 하십니다. 그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시던 최인규 권사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목으로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창씨 개명, 또 일본 천왕이 사는 동경을 향해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하는 동방요배에, 툭하면 나오라는 부역, 모이기만 하면 하는 황국신민서사 이런 것을 거부해가지고 요시찰인물이 됩니다.
그러던 중에 일본 순사의 눈엣가시 같은 최인규 권사가 또 신사 참배까지 거부하니 이것을 이유로 1940년 5월에 붙잡아 들입니다. 근데 그 전에 그 혼쭐이라든가 좀 창피를 주기 위해 똥지게를 지게 해서 동네 집집마다 조리돌림을 하는데요. 신사 참배 거부한 것을 외치고 다니게 했습니다. 그때 최인규 권사님은 "나는 예수 믿는 최인규요. 내가 신사 참배 거부한 최인규요" 하면서 큰소리로 당당하게 외치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삼척 경찰서에 잡혀 있을 때는 같이 신앙을 생활을 하던 차 모 씨가 가서 경찰서장에게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데, "최인규 권사가 옛날에 정신병을 좀 앓았는데 아마 재발한 것 같아 그러니 좀 풀어달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삼척경찰서장이 당시 한 말은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 같이 믿어라. 당신도 예수를 믿지 않느냐"고 얘기하면서 "(최인규 선생이 예수를 믿는다는) 그것을 왜 정신병자라고 하냐"고 핀잔을 줍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구명도 못하고 나온 일화가 있습니다.
이듬해에 함흥 재판소에서 불경죄로 2년형을 받고요. 그다음에 대전 형무소로 이감돼 가지고 수감생활을 하는데 그때 수감자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를 시키는데 이것을 할 때마다 하지 않는다고 구타해서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이 최인규 권사는 "너희들이 주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시다가 1942년 12월 16일 14시에 대전형무소 옥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국 순교하셨습니다.
◇ 최진성> 최인규 선생의 일대기가 그냥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다가 그렇게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정말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셨고 또 전 재산을 봉헌하기까지 했고요. 또 일제 치하 당시에서는 확실한 신념을 지키셔서 신사 참배, 창씨 개명, 동방요배를 거부하셨고요. 또 황국신민서사 역시 거부하면서 그 당시에 저항할 수 있는 모습들은 다 보여주시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인규 선생에 대해서 참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자료를 수집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최인규 선생에 대한 조사 또 연구를 하시게 됐는지요?
◆ 김형걸> 17살 때 교회로 우편으로 배달되는 주간 복음 신문에서 처음으로 최인규 권사님의 순교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 최진성> 17살 때면 몇 년 전인가요? 지금으로부터.
◆ 김형걸> 지금으로부터 아마 53년 전 쯤 될 겁니다. 그 신문 8면 중에서 두 면 전체 이분에 대한 순교사를 실었는데 아주 큰 글자로 '천곡교회 순교자 최인규 권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가 순교자 교회고 또 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 예배당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내용을 사진이나 복사해서 나눠서 볼 때가 아니었습니다. 꼭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그저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다른 데 옮겨 적어 필요할 때 보곤 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문 내용을 저도 노트에 옮겨서 적어놓고 이게 사실인지를 어머니한테도 물어보고 또 이웃 어른분들에게도 물어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자료 수집의 시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제가 수집한 자료로 기념비도 세우고 또 자료가 필요한 분들에게 제공해 가지고 논문 간행물이나 또는 책을 낼 때마다 제가 가진 자료가 쓰여졌다는 것도 좋지만 더 많은 자료가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한 자료를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고 기회가 되거나 아니면 어떠한 순간에라도 거기에 관한 일이 있다면 듣고 보고 하는 대로 자료를 모은 지가 지금 50년이 넘었죠. 네, 그렇습니다.
◇ 최진성> 지난해 독립 유공자로 서훈이 됐지만 사실 그 과정까지 꽤 오래 걸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시간이었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 김형걸> 최인규 권사에 대해 저희들은 순교자로 많이 호칭을 했습니다. '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비' 이렇게 기념비도 있는데 자세히 따져보면 신사 참배 거부는 순교가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이 이야기하기는 동방요배라든가 황국신민서사, 창씨 개명 이런 부분은 기독교 신앙관하고 또 신앙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일제가 요구하니까 여기에 반대해서 항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애국이죠. 그러면 이런 애국을 하다가 죽었으면 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순교 순국자 최인규 권사 생애'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이분에 대해서 첫 순국·순교자라는 호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항거 하시다가 옥 중에 사망했으니 순국자로 독립 유공자가 마땅하다고 생각하고서 저희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해 줄 것을 신청했습니다.
◇ 최진성> 한 몇 년 전인가요?
◆ 김형걸> 1996년 5월에 첫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첫 신청하고 자료 부족이라고 해서 보완 서류를 제출하고, 재심, 다시 보류, 다시 보완, 서류 제출, 다시 보류, 이렇게 심사와 보류, 제출 이런 걸 수 차례를 했는데도 계속 보류가 되는 겁니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지방 장로님 두 분하고 제가 국가보훈처가 대전에 있었는데 거기를 방문해서 왜 선정이 안 되느냐고 집중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신사 참배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렇게 해오던 중에 2017년도 정도 돼 가지고 지역 국회의원한테 지역 기독교인들의 숙원 사업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분이 국정 감사에서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 유공자 발굴도 하는데 일제에 항거 하시다가 옥중 사망하셨는데 왜 독립유공자 지정이 자꾸 늦어지는지 보류가 되는지 보훈처에서 좀 도와주면 안 되느냐" 해서 도와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요청에 보훈처 직원들이 이제 저희 지역에 파견돼 가지고 조사도 하고 증인 청문도 하고 또 서류 작성하는 방법도 알려줘서 저희들이 보안 서류를 만들어 또 접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이제 보훈처에서 직접 이렇게 챙기고 조사했으니까 이제 꼭 되리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 심사가 끝난 다음에 통보는 보류였습니다.
◇ 최진성> 이유는 뭐였나요? 역시 자료 부족이었나요?
◆ 김형걸> 아니요. 자료 부족이 아니고요.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은 독립 유공자의 배제한다는 규정 때문인 거죠. 아예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적 신념에서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데 상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짜증도 내봤습니다.
◇ 최진성>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니 사실 이 장로님께서 이걸 또 하셔야 될 의무는 없으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신 이유가 있을까요?
◆ 김형걸> 권사님이 교회에 전 재산을 내고 신앙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저희 교회가 그분의 기념 예배당을 세우고 해서요. 이제 순교자라는 명칭만 붙였으면 누구도 다 인정하는 순교자인데 그 앞에다가 순국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순국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부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을 부르짖는 자가 거짓말입니다. 제가 거짓말쟁이가 되기 싫어서 끝까지 요청을 했습니다.
◇ 최진성> 그리고 지난해였습니다. 지난해 11월 제 84주년 순국 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유공자 지정에 대한 포상이 있었는데 이때 최인규 선생, 최인규 권사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됐습니다. 참,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느낌을 알 수가 없을 텐데 그때 느낌과 상황들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 김형걸> 순국 순교자 최인규 권사님을 아시는 모든 분들하고 지역 기독교인들의 염원을 우리 본부에서 듣고 신사 참배 거부로 옥중 사망하신 분들에겐 독립 유공자로 지정 포상이 이루어지도록 규정을 정비하고 첫 신청 후에 드디어 28년 만에 신규정에 의해서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는 첫 사례자가 되었습니다.
2023년 11월 17일 순국 선열의 날 그 서대문에 있는 순국선열의 탑 앞에서 최인규 선생의 외증손자께서 훈장을 받고 저는 화환을 수고한 분들을 대표해서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유가족분에게 훈장만 수여해 왔는데, 금년에 처음으로 유공자 발굴에 공을 남긴 자도 함께 화환으로 그 수고를 격려하는 거라고 제게 얘기하더라고요.
얼마나 영광스럽던지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나 물질, 그보다도 마음 고생했던 것을 한순간 하나님께서 풀어 해결해 주셨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함께 수고하고 애쓴 모든 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이루어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특히 이 영광이 있기까지 지역 국회의원님을 비롯하여 일꾼과 도구로 쓰임 받는 모든 이들의 수고와 노력에 천곡교회 선임 장로로서 찬사와 감사 인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최진성> 참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더 뜻 깊은 벅찬 기분도 있으실 것 같고요. 옥중 순국한 분에 대해 새롭게 마련된 포상 기준에 의한 첫 번째 서훈 사례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이후에 제 나오게 될 독립 유공자에도 또 영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김형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사 참배는 종교적 신념에서 행한 일로 치부되어 가지고 신사 참배 한 가지만으로는 옥중에서 돌아가셔도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돼 왔습니다. 신사 참배로 옥중 사망하신 분에게는 전에는 종교적 신념이니 이런 구실을 붙였는데, 이제는 그걸 없애고 그 공로로 포상하는 규정을 만들 줄 압니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 최인규 선생님이 첫 사례자라고 된 것이 영광입니다. 신사 참배 거부 옥중 순교자 중 평신도로서, 신규정이 적용된 첫 사례라고 해서 오래 오래 많은 이들이 기억할 줄 믿습니다.
◇ 최진성> 앞으로 최인규 선생에 대한 또 여러 추모 행사 등 다양한 계획들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계획과 함께 방송을 듣는 분들께 당부의 말씀까지 해주시죠.
◆ 김형걸> 지금 행해오는 매년 행사로는 33주기부터 해오던 순국 순교자 최인규 권사 추모 예배가 있는데 천곡교회에서 날짜를 조율해 가지고 해오다가 56주기부터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주최로 매년 천곡교회에서 드린 지가 24년 째입니다.
그리고 3.1절 기념 예배 및 순국 순교자 추모 기도회를 동해 삼척 지방의 남선교회 주최로 사화동 무릉계곡 광장에서 매년 3.1절 날에 해 왔는데 금년은 25번째로 동해시 모교회인 북평제일교회에서 11시에 2백 여 명이 모여 예배하고 또 참가자들에게는 가정에서 게양할 수 있는 태극기를 기념품으로 나누었습니다.
또 천곡교회에서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어서 매년 전국에서 1천 여 명 이상 순방객들이 찾아와서 "나는 예수 믿는 최인규요, 내가 신사 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 당당히 외친 그 대목을 볼 수 있고요. 또 노인의 몸으로 모진 고문과 구타가 안쓰러워서 "권사님 말만 하면 내 보내줄 것 같으니 (황국신민서사 등을) 하겠다 하고 나가세요"라고 권면한 한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양심으로 하는 말이오? 나는 양심으로 사니 더 이상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더 이상 그 분과의 상대하지 않았다는 대목을 볼 수 있습니다. 관람객들이 최인규 권사님의 신앙에 감명하고 자신들의 삶을 살펴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앞으로의 추모 행사는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던 것을 시·도와 협조해 독립유공자 최인규 선생의 애천 애국 애족의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선양해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담아 행동으로 나타내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 최진성> 지난해 11월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신 최인규 선생의 이야기 짧은 시간이지만 또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최진성의 위클리오늘 삼일절을 맞아서 최인규 선생에 대한 이야기 전해주신 동해 천곡감리교회 장로이시자 순국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김형걸 장로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형걸>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