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면허를 정지하겠다는 정부의 최후통첩에도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들이 2주째 복귀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의협)의 '대표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보건복지부가 의협을 두고 의료계에 '대표성 있는 구성원'을 모아달라고 제안한 데 이어, 대통령실까지 나서 의협은 의료계의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고 밝히면서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의협이 전공의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의대 중심의 새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그러나 정부와 대화의 장에 나와야 할 전공의들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고, 의대 교수들의 중재 시도도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의사들의 단체행동으로 직접 피해를 받고 있는 국민들은 의협을 의료계 대표단체로 인식하고 있지만, 의료계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는 모습에 불안감만 커지고 있다. 정부가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들에게 복귀하라고 한 시점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협상 테이블을 차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사회적으로 파장을 미치는 의료계 파업의 주도권은 과거부터 전공의들이 가지고 있었다. 지난 2020년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을 무산시킨 것도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개원의' 중심인 의협의 집단휴진 참여율은 채 10%가 되지 않았지만, 전공의들은 80% 이상이 의료현장을 이탈해 단합력을 과시했다.
정부가 바뀌고, 4년 만에 재연된 이번 파업도 마찬가지다. 전공의들은 지난달 22일 55개 수련병원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의대 증원 강행시 단체 행동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전공의 비율이 86%에 달했다고 밝혔다.
또 서울 빅5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전공의들은 총파업 참여 찬반 투표를 진행하고, 이후 집단 사직서 제출을 예고했다. 실제 1천명이 넘는 전공의들은 예고대로 지난 19일 사직 의사를 밝혔고 이후 전국에서 줄사직이 잇따랐다.
2020년에 이어 올해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을 주도한 것은 역시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였다. 전공의 대표단체로 알려져 있는 대전협에 가입돼 있는 전공의는 전국 140개 병원 소속 1만 5천여명이다. 통계청 자료에서 2022년 기준 전국 전공의가 총 1만 2774명(인턴 3137명·레지던트 9637명, 전체 의사의 9.5%)으로 집계된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치다.
이런 대전협이 최근 의협과 따로 비대위를 꾸리며 별개 단체인 듯한 행보에 나섰지만 실상은 의협의 산하단체다. 조직도를 살펴보면 의협은 산하에 의학회·협의회·한국여자의사회·시도지부 등을 두고 있는데, 대전협은 협의회에 소속된 단체다. 협의회에는 대전협 이외에 개원의협의회, 군진의사협의회, 공직의협의회, 공보의협의회, 병원의사협의회, 병원장협의회 등도 포함된다.
실제 대전협은 여러 부분에서 의협과 논의를 함께한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도 대전협 박단 회장은 의협 비대위 투쟁위원으로도 참여했다. 다만 파업 등 중대한 논의는 대전협 자체적으로 회원들의 뜻을 모으기 때문에 종종 의협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0년 최대집 당시 의협 회장은 의대증원 등으로 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빚던 중 더불어민주당과 정책 추진 및 의료계 파업 중단 등을 골자로 한 합의문을 도출했지만, 무기한 총파업을 벌이고 있던 전공의들의 반발을 산 바 있다. 이후 진통 끝에 전공의들도 파업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박지현 당시 대전협 비대위원장은 의협의 구속을 받지 않는 새로운 젊은의사 기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당시 박 위원장은 "대전협은 의협의 공식 산하단체이므로 (민주당과) 의협 합의사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가 있다"며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전공의 노조와 의대생·전임의협의회를 포함하는 새 기구를 만들겠다. 회원들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의협이 오직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의결구조를 바로잡겠다. 젊은의사들에 대한 존중 없이, 졸속 합의한 책임자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2020년 전공의들의 무기한 총파업은 민주당과 의협의 합의안을 정부가 수용하면서 종료됐다. 즉, 의료계 내 잡음은 있었지만 당시 의협이 사실상 파업을 종료시킨 셈이다. 이런 사례에 비춰보면 의협이 전공의들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전공의들의 파업을 주도하는 대전협이 의협 산하단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지속적으로 의문 부호를 달고 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지난 26일 브리핑에서 "의료계에서는 전체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대표성 있는 구성원을 제안해 주기를 바란다"면서 개원의 중심인 의협보다 의료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성 있는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거론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28일 "의사협회는 의료계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접촉해 말씀을 들어보면 의협이 대표성을 갖기는 좀 어렵다"며 "대표성을 갖춘 구성원을 의료계 내에서 중지를 모아 제안해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가시적으로 합의를 이룬 것을 전달받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특히 대형병원, 중소병원, 전공의, 의대생, 의대교수 입장이 각각 결이 다른 부분이 있다며 "정부 대화에 실효성이 있으려면 대표성이 있는 기구나 구성원과 이야기가 돼야 하는데, 각자 접촉하는 방식으론 굉장히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근 사퇴한 정진행 서울의대교수협의회 비대위원장도 "전공의·의대생 소속이 대학이다. 그들을 지도하는 게 의협인가? 대학교수이지 않나"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수호 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협이 대표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정부가 말하는 것은 대한민국 법에 있는 의료법상 법정 단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법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며 "의협은 전공의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있다. 의협이 대전협 비대위에서 나오는 결정사항이나 행동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는 것도 이같은 이유"라고 주장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날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전공의 대표 단체를 정부 차원에서 지정하긴 힘들지만 전공의와 관련한 정책적 논의를 할 때는 대전협, 의협, 대한의학회 등 다양한 단체의 의견을 듣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전공의 관련 정책을 만들 때) 두루두루 의견을 듣고 한다. 그 중에는 대전협, 의협, 대한의학회도 있다"며 "전공의 정책이라는 게 전공의만을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병원과 그 병원에 있는 교수님들, 전문의분들도 다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복지부와 의협은 각종 의료현안을 논의하는 의료현안협의체를 구성해 회의를 진행한다. 지난달 31일 개최된 회의에는 복지부에서 정경실 보건의료정책관, 김한숙 보건의료정책과장 등이 참석했고, 의협에서는 서정성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 박단 대전협 회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