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08-15
광복 직후 인구 수 1600만 명…연 4%씩 인구 증가
광복 직후 남한의 인구는 약 1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한국은 출산율이 높지만 사망률도 높은 후진국형 인구현상을 보였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연 4%의 인구 증가 추세를 보였는데 이는 일제 강점 때 강제징집 등을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귀환민의 유입, 남북한 간의 인구 이동 등의 영향이다. 사진=국가기록원
1953-08-10
한국전쟁 이후…출산율 폭발 '베이비붐'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출산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났다. 1차 베이비붐 세대로 규정되는 1955년~1963년 출생아 수는 710만 명에 달한다. 당시 '가족계획사업'은 국가 차원이 아닌 개인과 해외 선교 단체 중심으로 이뤄졌다. 1959년 보건사회부 모자보건위원회가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시책으로 채택할 것을 보건사회부장관에게 건의했는데 이는 정부기구에서 공식적으로 가족계획이 논의된 첫 사례다. 사진=국가기록원
1960-01-01
출산율 6명…"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0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6명으로, 연 3%의 인구성장률을 보였다. 과도한 인구 증가를 우려한 박정희 정부는 1961년 출산을 억제하는 '가족계획사업'을 펼쳤다. 피임술 보급을 위해 가족계획 요원이 전국 읍·면 단위로 배치됐고, 가족계획심의위원회가 임신중절을 권장하기도 했다. '세 자녀(3)를 세 살 터울(3)로 낳아 서른다섯에 단산하자(35)'는 의미의 '3-3-35 운동',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표어 등을 내세웠다. 사진=정책공감
1970-01-01
출산율 4.53명…"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70년 출산율은 4.53명까지 줄었으나, 1970년~1971년 출생아 수가 각각 100만 명을 넘으며 2차 베이비붐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사회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었기에 정부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등의 표어를 통해 이상적인 자녀 수를 '3-3-35 운동'의 3명에서 2명으로 낮추고자 했다. 1972년에는 임신중절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으며, 1977년에는 불임시술을 받은 이에게 공공주택 우선입주권 혜택을 주기도 했다. 사진=정책공감
1983-01-01
저출산국 진입했지만…"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으로 1980년 출산율이 2.82명까지 낮아졌다. 1983년 출산율은 2.06명으로 대체출산율(2.1명)보다 낮아져 저출산 국가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산아제한정책을 계속 시행했는데, 여성 한 명 당 아이를 낳는 '출산율'은 낮았으나 가임 여성 인구가 워낙 많아 전체 인구 대비 출생아 수인 '출생률'은 높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결과 출산율은 1.56명(1989년)까지 하락했다. 80년대는 출생아의 성비 불균형이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희망 자녀 수가 줄었지만, 남아선호는 남아있어 '여아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1981년 우리나라 출생아 성비(여아 100명 당 남아 수)는 107.2명으로 세계평균수준을 유지했으나 1990년 116.5까지 증가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96-01-01
출산율 1.57명…산아제한 정책 공식 폐기
1996년 정부는 산아 제한 정책을 종료, 인구정책의 목표를 '인구 자질 및 복지 증진'으로 변경했다. 인구증가 억제정책 지속 추진 시 노동력 감소와 사회경제 발전 악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결과다. 90년대 초중반 1.5명~1.6명 사이에서 머물던 출산율은 1998년 1.46명으로 하락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가족해체와 산아제한 정책의 장기화 등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사진=MBC 캡처
2002-01-01
출산율 1.18명…초저출산·고령화사회 진입
출산율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2000년 한국은 만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7.2%를 차지해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2002년 합계출산율이 1.18명으로 초저출산 기준(1.3명) 보다 낮아져 초저출산 시대가 본격 시작됐다. 2005년에는 1.09명까지 낮아지며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같은 해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저고위(저출산·고령사회 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인구구조 악화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보육비 지원, 주택 특별공급 및 전세자금 대출, 난임부부 수술비 지원, 아빠 출산휴가 등이 도입됐다. 사진=보건복지부
2018-01-01
합계출산율 0.98명…1명대 붕괴·고령사회 진입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에코세대(1979~1992년 출생) 대다수가 사회에 진출하며 출산율 회복을 기대했지만, 출산율은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남아선호사상 여파로 가임기 여성 인구가 감소했고 일자리·주거 불안으로 인해 초혼 연령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2018년 출산율은 0.98명으로 1명대가 붕괴됐고,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저출산 대책을 노동·고용·주거·교육·보육·성평등 등의 관점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기며 아동수당,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육아휴직급여 정률제, 아빠 육아 인센티브 등이 도입되고 유자녀 부부에 대한 주택 특별공급 및 전세자금대출 등이 확대됐다. 사진=고용노동부
2020-01-01
출산율 0.84명…코로나 감안해도 'OECD 꼴찌'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으로 사람 간의 접촉이 줄고,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며 혼인 건수와 출산율이 자연스럽게 하락했다. 임신 중 태아나 신생아가 코로나에 감염될 것을 걱정한 부모들이 피임으로 임신 시기를 늦추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전세계 주요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출산율 하락을 겪었으나, 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 0명대는 한국이 유일했다. 사진=노컷뉴스
2021-01-01
출산율 0.81명…세집 중 한 집이 1인가구
또 한 번 역대 최저 합계출산율을 기록했다.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청년세대가 늘며 1인 가구도 크게 증가했다. 2021년 1인가구 비중은 전체의 33.4%로 세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 1인 가구가 남성에 비해 2배 많았다. 외신들은 한국의 낮은 출산율을 조명하며 '집값', '불안정한 고용 환경', '성평등 문제' 등이 젊은 세대의 결혼에 대한 기대감을 낮췄다고 분석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2022-01-01
출산율 0.78명…에코 세대 출산붐 없었다
사적 모임 등을 제한해온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며 젊은 세대들이 미뤄둔 결혼과 출산에 나설 것이라는 바람과 달리 출산율은 0.78명으로 하락했다. 2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2차 에코붐 세대(1991~1996년 출생)가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접어들며 출산율 하락을 막아줄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이 역시 불발됐다. 2022년 출생아 수는 24만9186명으로 10년 전인 2012년 출생아 수(48만 4550명)와 비교했을 때 반토막 수준이다. EBS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한 교수가 한국의 합계출산율을 듣고 "대한민국 완전 망했네요"라는 반응을 보인 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진=EBS 캡처
2023-01-01
출산율 0.72명…흑사병 보다 빠른 韓인구감소
2023년 출산율은 0.72명으로 또 한 번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연간 출생아 수는 23만명선이 무너졌고, 특히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까지 추락했다. 올해 출산율은 0.6명대를 기록할 것으로 확실시된다. 한국의 빠른 인구감소에 NYT는 "한국은 선진국 인구 감소 문제 중에서도 놀라운 연구 사례"라며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급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때보다 더 빠른 속도"라고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