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연패를 끊어내며 분위기 반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장 사령탑 경질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팀의 최고참이 '후배 괴롭힘 의혹'으로 팀을 떠나게 됐다. 하루 만에 감독과 베테랑의 공백이 생겼다.
분위기가 반전되기는커녕 최악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프로배구 여자부 '꼴찌' 페퍼저축은행의 얘기다.
페퍼는 지난 23일 경북 김천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3-2024 V-리그 6라운드 첫 경기 한국도로공사와 원정에서 세트 스코어 3 대 2(23-25 24-26 25-22 27-25 15-9) 역전승을 거뒀다. 105일, 24경기 만의 승리였다.
이전까지 페퍼가 거둔 승리는 지난해 11월 10일 GS칼텍스와 원정이 마지막이었다. 시즌 23연패를 기록하며 V-리그 여자부 최장 연패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자칫하면 남녀부 통틀어 최장 연패 기록(2012-2013시즌 KEPCO 25연패)까지 경신하게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3시즌 연속 꼴찌도 확정됐지만 페퍼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1, 2세트를 내주고도 3, 4, 5세트를 따내며 연패 사슬을 끊기 위한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승리가 확정되자 페퍼 선수들은 부둥켜안고 승리를 자축했다. 일부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3연패 중에도 경질 않더니…연패 끊으니 '계약 해지'?
남은 경기는 5경기. 페퍼의 현실적인 목표는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었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발판은 마련됐다.
그러나 분위기를 끌어올려야 할 시점에서 뜬금없이 사령탑 조 트린지 감독의 계약 해지 소식이 들려왔다. 페퍼 관계자는 27일 트린지 감독과 계약 해지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행정 작업만 끝나면 공식 발표가 난다는 것이다. 남은 5경기는 이경수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다.
하지만 시즌이 5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 데다 23연패를 끊어낸 시점에서 감독 경질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독을 바꾸려면 위기가 고조되던 연패 중에 기존 감독을 해임하고 새 사령탑을 데려와 분위기를 전환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트린지 감독은 23일 도로공사전 승리 이후 남은 경기를 지휘하겠다는 의사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린지 감독은 올 시즌을 앞두고 페퍼에 급하게 영입됐다. 이번 시즌을 맡기로 한 페퍼의 2대 사령탑인 아헨 킴 감독이 개막하기도 전에 팀을 떠나는 촌극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린지 감독을 향한 기대감은 컸다. 미국에서 '배구 전략가'로 평가받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페퍼에 오기 전 트린지 감독은 2014년 미국 여자 대표팀 세계배구선수권대회 첫 우승, 2015년 월드 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 금메달 및 랭킹 1위, 2016년 올림픽 동메달 등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트린지 감독은 부임 후 줄곧 '스마트 배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를 시즌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트린지 감독의 V-리그 성적은 3승 28패. 승점은 고작 10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시즌 도중 계약 해지 통보를 받으며 1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팀을 떠나게 됐다.
베테랑 '오지영發 충격'까지…팀 분위기는 뒤숭숭
이뿐만이 아니다. '최고참', '맏언니', '베테랑', '국가대표' 리베로 오지영(36)이 후배를 괴롭혔다는 의혹에 휩싸여 배구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오지영은 선수 자격을 정지당하고 팀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페퍼 구단은 27일 오후 "금일 부로 오지영과 계약을 해지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지했다. 그러면서 "구단 내 불미스러운 일로 팀을 아껴 주시는 팬 여러분과 한국배구연맹 그리고 배구 관계자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23연패를 기록 중이던 페퍼는 지난 22일 내홍에 휘말렸다. 팀 내 베테랑 선수 A가 후배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는 의혹에 휩싸인 것이다. 후배 B, C는 지난해 같은 팀 선배 A로부터 지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결국 팀을 이탈해 구단으로부터 임의해지됐다.
베테랑 선수 A가 국가대표 출신 베테랑 리베로 오지영으로 밝혀지면서 배구계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 오지영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은메달, 2020 도쿄올림픽 4위 등 국제 대회에서 주전 리베로로 활약하며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영광의 시대'를 함께 한 선수다.
클럽 경력도 화려하다. 리그 경력만 무려 16시즌을 지닌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오지영은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도로공사에 입단해 KGC인삼공사(현 정관장), GS칼텍스를 거치며 전성기를 누렸다.
2022년 말 페퍼에 새 둥지를 튼 오지영은 팀의 성적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번 시즌에도 22경기에 출전해 리시브 효율 42.58%, 세트당 디그 4.867개를 올리는 등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배구연맹(KOVO)은 '선수 자격 정지 1년'이라는 무거운 징계를 내렸다. KOVO는 27일 오전 오지영의 행동에 대해 "중대한 반사회적 행위"라며 "앞으로 프로 스포츠에서 척결되어야 할 악습"이라고 판단했다.
선수인권보호위원회규정 제10조 제1항 제4호, 상벌규정 제10조 제1항 제1호 및 제5호, 상벌규정 별표1 징계 및 제재금 부과기준(일반) 제11조 제4항 및 제5항에 따라 이와 같은 징계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유사 행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최악의 23연패에서 벗어났지만 곧바로 대형 악재를 맞은 페퍼. 순식간에 감독과 최고참이 팀에서 빠져나가며 창단 이후 가장 큰 위기를 이겨내야 할 상황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