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라면 어떻게 됐을까?[워싱턴 현장]


한국에 A공립고교가 있다고 치자. 이 학교는 해마다 전국 고교 랭킹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연구할 수 있는 각종 시설들이 마련돼 있고 선생님들도 훌륭하다. 명문대 진학률은 말할 것도 없다. 한 학년 정원이 480명이다 보니 전국의 수재들이 아니고서는 지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원자들의 중학교 성적도 입학 사정에 중요 요소지만 학교마다 편차가 있으니 별도의 입학시험이 있다. 사실 입학시험 성적이 당락을 결정했다. 입학원서대금도 10만원을 받는다. 여기다 학생들은 자신이 살아온 배경이나 미래 목표 등을 담은 에세이도 제출해야한다. 추천서도 필수다.
 
이런 과정을 통해 A고교에 입학한 학생들을 분석해봤더니, 어느 한해에는 특정 지역 출신이 73%를 차지했다. 또 다른 특정지역에서는 1%의 학생들만이 이 학교에 진학했다. 
 
이에 A학교 교장은 "교내에 있는 학생들을 보면 어느 특정 지역의 아이들만 보인다"며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권'이 아닌지 생각해봐야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교장은 아예 입학제도 변경을 밀어붙였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시됐던 자체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원서대금도 없앴다. 이참에 한 학년 정원도 550명으로 늘렸다. 최저 평균성적(GPA) 기준을 높이되, 중학교의 상위 1.5% 이내 지원자는 합격시켰다. 
 
그 결과 10년 만에 A고교에 입학생을 배출하게 된 중학교가 생겨났다. 73%였던 특정 지역 출신은 54%로 줄었다. 대신 1%였던 특정 지역 학생들은 7%로 늘었다. 
 
A고교 교장은 "우리는 오랫동안 새로운 입학 제도가 헌법적이며 우리 모든 학생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었다"며 "이 제도는 모든 자격 있는 학생들이 우수한 고등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보장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사실 A고교는 미국 내 1만 8천여개 공립 고등학교 중 '최고의 학교'로 꼽히는 '토마스 제퍼슨 과학기술 고등학교(Thomas Jefferson High School of Science and Technology)'이다.
 
워싱턴 DC와 가까운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해 이곳에 사는 한인들과 특파원·주재원들이 자녀를 가장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 중 하나다. US뉴스가 선정하는 2021년 전국 고등학교 평가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지난 2020년 5월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흑인 인권 문제가 미 전역을 휩쓸 당시 실제로 입학제도를 뜯어고쳤다.
 
그 결과 아시아계 입학생 비중이 뚝 떨어졌고 대신 흑인, 히스패닉, 백인 학생의 숫자는 늘어났다. 이는 입학의 핵심이었던 표준화된 자체 입학시험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전년 대비 2021년 합격자를 보니, 흑인 합격자의 비중은 1.23%에서 7.09%로 늘었고, 히스패닉 학생도 3.29%에서 11.27%로 늘었다. 백인 합격자 비중도 17.70%에서 22.36%으로 높아졌다. 반면 아시아계 합격자 비율은 73.05%에서 54.36%으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에 'TJ를 위한 연합'이란 학부모 단체가 결성됐고, 이들은 새로운 입학 제도가 아시아계 학생들의 희생을 토대로 인종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안됐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인종 차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측은 "새로운 입학전형은 실력 중심이며, 입학 사정관들은 지원자의 인종과 성별을 알지 못한다"고 맞섰다. 
 
1심은 'TJ를 위한 연합'의 손을 들어줬으나 2심에서는 반대로 학교측이 승소했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TJ를 위한 연합'에는 한가닥 희망이 있었다. 
 
때마침 미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미국 대학교 입시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은 위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연방대법원이 어퍼머티브 액션을 합헌이라고 했다면, 토마스 제퍼슨 고교 소송도 거기서 매듭 지어졌을 것이다. 
 
해당 소송의 쟁점이 더 많은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의 합격시키기 위한 인종 차별적 입학 제도 변경이냐 아니냐였기 때문이다. 
 
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은 어퍼머티브 액션을 위헌으로 판단하면서 "학생은 인종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TJ를 위한 연합'의 주장과 그대로 맞아떨어진 부분이었다.
 
이에 학부모들은 2심 결과에 불복하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물론 모든 상고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총 8명의 연방대법관 중 최소 4명이 동의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퍼머티브 액션도 위헌이 된 마당에 비슷한 소송을 외면할 리 없다고 학부모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들의 기대와는 멀었다.  
 
대학 입시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기한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아시아계를 차별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고교의 입학 제도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심리가 시작되기 위한 정족수인 4명의 대법관이 채워지지 않아 이번 소송은 학교의 최종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무심하게도 이번 사건을 심리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새무엘 알리토 대법관은 2심 판결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통해 "토마스 제퍼슨 고교의 새 제도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한 성과를 내는 한 그 인종을 차별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어퍼머티브 액션 폐기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연방대법원이 민감한 사안을 애써 피해가려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왠지 한입으로 두말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아 '법적 신뢰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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