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에서 전공의들이 무더기 사직을 하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의 걱정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른바 서울 '빅5' 병원(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병원을 찾은 환자와 보호자들마다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 병원이 정상 운영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백혈병 투병 중인 아들 장진석(18)군과 함께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정윤순(46)씨는 "예약까지 했는데 전공의들이 파업해서 교수님 한 분이 환자들을 진료한다"라며 "환자들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서 제가 먼저 '(오늘 말고) 다른 날로 예약하겠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호소했다.
정씨 주변에만도 병원 진료를 받지 못해 애가 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정씨는 "친구 부모한테 전화가 왔는데 정형외과 진료를 보려고 협진을 요청했더니 두세 달 걸린다고 했다"며 "우리 같은 아이들은 동네 병원에서 '일단 봐라'고 교수님이 하셨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발만 동동 굴렸다.
곧 아이를 낳는 산모들의 불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출산을 약 두 달 앞둔 배수지(33)씨는 "아기를 낳는 것은 시간을 바꿀 수도 없으니까 불안하다"면서도 "3월 안에 (의료계 집단 행동이) 끝나지 않을까 희망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재왕절개) 수술을 하게 되면 조금 걱정될 것 같다"라며 "(그래서) 웬만하면 수술하지 않고 자연 분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암병원에서도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난소암이 재발할까 걱정된다던 김수련(54)씨는 갑자기 진료 일정이 바뀌면서 당혹스러웠다고 전했다.
김씨는 "오전에 진료가 예정됐는데 당일 두 시간 전에 진료 일자를 변경하겠다는 메시지가 왔다"며 "다행히 지난해 8월부터 서울 강서구에 집을 구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김포 본가까지 다시 돌아갔어야 할 판"이라며 속상해했다.
그는 "어제 병원에서 의료진 부족 때문에 진료가 늦어진다고 공지해줬는데, 알고보니 입원 중인 환자들이 전부 외래로 바뀌어서라고 했다"며 "오늘은 벌써 한 시간 전에 항암 외래 진료가 다 차버렸다"고 걱정했다.
이처럼 의사들의 집단 행동이 길어질수록 환자들의 걱정이 쌓여가지만,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
"3시간 기다려도 의사 얼굴 못 봐"…더 열악한 지역 상황
"3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의사 얼굴도 못 봤어. 늙은 게 죄지."정부의 의대 증원 등 의료 개혁에 반대한 전공의들 대다수가 수련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강원도 내 대학병원들도 혼란에 빠졌다.
필수 응급 의료 분야와 응급실의 경우 의료진을 추가 배치하고 교수 등 전문의들이 투입돼 현장을 수습하고 있지만 이번 집단행동이 장기화할 경우 의료 시스템 붕괴는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현장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날 오전 강원도내 유일한 국립대병원인 강원대병원 접수 및 수납 부스는 이른 시간부터 환자들로 붐볐다.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된 심장내과 진료실 앞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에도 대기 인원이 많은 진료과목이다 보니 대기 시간이 길지만 병원 내 전공의의 63.3%가 전날부터 집단 사직서 제출로 인한 공백이 환자들의 진료 불편으로 이어지면서 불만도 커지고 있다. 외과의 경우 레지던트 4년 차를 제외한 대다수가 사직서를 낸 상태다.
내과의 경우 전공의 사직서 제출 비율이 절반으로 전체 비중보다는 적지만 환자 수가 많아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 7시에 홍천에서 출발해 진료를 받으러 온 최모(66)씨는 "일찍 와서 기다려야 하니까 미리 와서 채혈하고 준비했는데 계속 시간이 밀렸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했다.
혈액종양내과를 찾은 한 환자는 "8시 50분부터 병원에 왔는데 이름조차 불리지 않았다. 늙은 게 죄인지"라며 호소했다. 병원 구석에 앉은 환자 뒤편에 위치한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켰다.
대구 시민들 또한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는 방식으로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집단이기주의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경북대병원을 찾아 외래 진료 대기표를 뽑고 대기하던 허 모씨는 "신경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평소엔 금방 순번이 돌아오지만 오늘은 대기시간이 조금 길어졌다"며 "아픈 사람 입장에서는 (병원이) 정상으로 복귀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혈액 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경북대병원을 찾는 강 모씨는 "환자 입장에서는 사람 목숨을 가지고 이러는 의사들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을 통해 의사가 있어야할 곳에 없는 심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진짜 안타깝다"고 병원을 이탈한 의사들을 나무랐다.
대전도 상황이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대전 지역의 각 병원 입구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비인후과 문제로 호흡과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대학병원 수술을 앞두고 있던 A씨는 수술 전 검사까지 마친 전날 입원과 수술 연기 통보를 받았다.
A씨가 받은 문자메시지에는 '입원 일정 연기 필요하여 개별 연락드릴 예정'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A씨는 "수술하려고 검사를 다 받고 왔는데 갑자기 연기한다는 통보가 와 그럼 언제 하냐고 물었더니 날짜도 없이 무기한이라고 한다"며, "더 급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호흡과 식사에 지장을 많이 받고 목소리도 변했는데 상당히 불편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앞둔 B씨 역시 갑자기 수술 날짜를 6주 뒤로 미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수술은 안 되고, 입원도 안 되고, 외래 진료만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게 B씨의 설명이다.
이처럼 전공의들이 사직서 제출에 이어 병원을 이탈하면서 입원과 수술이 미뤄지기 시작하는 등 환자들의 '병원 유랑'도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을 점검한 결과, 전공의의 71.2%인 8816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근무지 이탈자는 소속 전공의의 63.1%인 7813명으로, 전체 전공의 중 3분의 2가 의료 현장을 떠난 것이다.
복지부는 현장점검에서 이탈을 확인한 끝에 전공의 6112명에게 업무개시(복귀)명령을 내린 상태다. 전체 전공의 1만 3천여 명 중 절반 가량에게 명령을 내린 셈이다.
이런 가운데 전국 중증 환자들을 대표하는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이날 호소문을 내고 "공공의료 체계 비상 가동은 중증 질환 치료를 대체할 수 없다"면서 "중증환자들은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 병원 밖으로 이탈한 전공의들은 조속히 의료 현장으로 복귀해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