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인턴과 전공의 등 의사들의 줄사직과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진료지원(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를 투입하겠다는 대책으로 내놓으면서 간호사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간호사들은 "무면허 의료 행위 지시에 노출돼 형사 입건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간호사 단체들 "불법의료행위로 의료 공백 메꿀 수 없다"
대한간호협회는 20일 입장문을 내 "정부가 시키는 대로 불법 하에 간호사가 투입돼 의료공백을 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도 입장문을 내 "인턴과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이 진료를 중단하고 의료현장을 떠나면서 이들이 담당하고 있던 의사업무가 간호사 등 타 직군에게 떠넘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건의료노조가 파악한 병원의 불법의료행위 사례는 '인턴·레지던트의 고유 업무를 PA가 담당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에 따라 심전도 검사나 정맥주사, 혈액배양검사 등 인턴·전공의 업무를 간호사나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응급구조사 등 타 직군에게 전가하는 일이 의료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반간호사를 아무런 교육·훈련도 없이 갑자기 PA로 배치해 의사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병원도 있다고 보건의료노조는 강조했다.
실제 수도권의 한 종합병원 간호사는 "현실적으로 전공의와 인턴이 없는 상황에서 전문의 혼자 환자들을 돌볼 수 없다"며 "그렇기에 간호사 등 다른 직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법의료행위에 대해서 병원은 책임지겠다는 말 대신 환자의 안전을 위해 (불법의료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인턴·전공의 집단행동 심화되면 PA 간호사 적극 활용 방안 고려"
간호사들의 이같이 반발하는 건 최근 정부가 인턴·전공의 파업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PA 등 간호사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대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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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최근 KBS1 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 전화인터뷰를 통해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향후 심화할 경우 PA 간호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5일부터 국내 주요 대형병원의 인턴과 전공의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하는 등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전국 전공의 약 21%가 속한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 성모병원 등 국내 5대 상급종합병원('빅5' 병원) 전공의들은 20일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를 중단했다. 같은 날 인천에서는 전체 전공의 540명 가운데 361명(66.8%)이 사직서를 내는 등 전국의 의료 현장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법적 사각지대' PA가 의료진 대체하는 건 의료불법행위 양산하는 꼴"
복지부는 전공의들의 파업이 장기화되는 시점에는 PA 간호사도 적극 활용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이는 사실상 의료불법행위를 양산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PA는 의사 역할을 일부 대신해 수술·검사·응급상황 시 의사를 지원하는 간호사를 말한다. 국내 의료법 체계에선 PA 면허가 별도로 규정돼 있지 않아 PA가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의료법상 간호사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 지도 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만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의사 인력이 부족한 다수 병원에서 전공의 빈 자리를 PA가 대신하고 있다. 지난해 병원간호사회가 발표한 '병원간호인력 배치현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PA는 2010년 1009명이었지만 2021년에는 5619명으로 12년새 5배 이상 급증했다.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PA까지 더하면 현재 1만명 이상이 병원에 근무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PA가 의료인력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법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하면서 이를 양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여러번 있었지만 의사단체들의 반대 탓에 번번히 무산됐다. 지난해에는 국회에서 이러한 간호사들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하자는 취지의 간호법을 제정해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지난해에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PA 채용 공고를 낸 삼성서울병원이 의료법을 위반했다"며 고발해 올해 초 병원장이 경찰에 입건되는 일도 벌어졌다.
"전공의 일도 책임도 다 떠안는다" 간호사들 '절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우려에 대해 "PA 간호사는 합법이냐, 불법이냐 논란이 있는 영역에 있는데 정부가 불법을 저질러 가면서까지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간호계는 우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의 또 다른 종합병원의 간호사는 "눈 앞에 환자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전공의나 인턴이 없다는 이유로 의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는 간호인력이 몇 명이나 있겠느냐"며 "비단 PA뿐만 아니라 일반 간호사나 방사선사 등의 의료인력들도 불법의료행위에 노출돼 있다"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간호사가 인턴 업무를 하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주목을 받았다.
서울아산병원에 근무한다고 밝힌 간호사 A씨는 "병원에서 인력이 부족하니 인턴 업무를 간호사에게 하도록 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적었다.
이어 A씨는 "이미 병원에 중환자가 너무 많은데 다른 병원에 전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저 환자들 내버려두고 나가버리면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며 "전공의까지 없는 상태에서 어레스트(arrest, 심정지) 환자 발생하면 어떡하나. 정말 큰일이다"라고 호소했다.
간호계·시민단체 "간호사 업무 범위·안전망 구축 등 법 체계 명시해야"
간호계에선 이번 기회를 통해 PA 업무를 제도권 내로 편입하기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간호사협회는 입장문을 통해 "정부가 먼저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고, 법적 보장과 안전망 구축 등의 내용을 법 체계에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역시 같은 날 "의사 파업이 장기화할 조짐이 보이면 PA 양성화 방안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