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사라지는 교섭권…복수노조의 함정

복수노조 13년…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악용
단체교섭 지연 등 마음에 안드는 특정노조 무력화

한 대학 병원에 빈 휠체어들이 세워져 있다. 기사 내용과 관계없는 사진. 황진환 기자

서울의 한 요양병원이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해 노조를 탄압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실제로 단체교섭이 지연되면서 교섭대표노조가 오는 4월 교섭권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특히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사용자 측이 노조를 무력화하는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특정노조 무력화에 '악용' 우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는 임금체계 정상화를 요구하며 지난 6일부터 단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병원이 특정 노조의 조합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임금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임금체계를 마련해달라는 게 노조의 핵심 요구다.

문제는 병원이 복수노조 사업장이기 때문에 1년 안에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하면 교섭대표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오는 4월이면 민주노총 금천수요양병원지부가 교섭권을 가진 후 1년을 채우게 돼 교섭권을 잃을 위기다.

노동조합법 시행령은 교섭대표노동조합의 지위 유지 기간에 대해 "교섭대표노동조합이 그 결정된 날부터 1년 동안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한 경우에는 어느 노동조합이든지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에 따라 전체 조합원의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가 사측과 교섭할 수 있는 대표 노조가 되고, 나머지 소수 노조는 교섭하지 못한다. 다만 소수 노조가 개별적으로 교섭하려면 사용자가 동의해야만 가능해, 노조 길들이기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5년 4월 3일 결성된 보건의료노조는 지난해 4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해 교섭대표노동조합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는 병원의 한국노총 한국공공사회산업노조 금천수요양병원지부와 '과반수 노동조합' 지위를 놓고 지노위에 이의신청한 끝에 얻어낸 결과다.

임미선 보건의료노조 지부장은 "현재 한국노총 지부장이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노조 탄압을 주도했던 사용자 측 사람, 병원장 다음 서열인 경영지원본부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병원 인사발령 통보문에 따르면, A 지부장은 2021년 6월 1일 자로 경영지원본부장에서 사회복지사로 인사 발령됐다.

보건의료노조는 2021년 12월 근로자 지위를 주장하며 한국노총에 가입한 A 지부장이 2021년 9월까지도 병원장, 원무과장 등과 함께 노사협의회 사용자위원으로 위촉돼 있었다며 사용자의 지배·개입 부당노동행위 의혹을 제기했다.

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었던 A 지부장은 사용자 측 징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병원은 "조합원에 대한 임금차별 시정 요구 태도가 불량하다", "조합원 폭행사건에 대한 CCTV 요구 태도가 불량하다" 등의 사유로 각각 감봉 6개월, 감봉 1개월 징계했는데 지노위는 이를 부당징계로 판단하기까지 했다.

"현행법, 기업노조 동원 교섭권 제한 못 막아…제도 개선 필요"


이처럼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교섭권이 제한되는 문제는 금천수요양병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대양그룹 계열사인 대양판지는 2020년 3월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노조(조합원 60명)가 설립되자 곧바로 기업노조(70여명)를 만들어 금속노조의 교섭권을 뺏은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2021년 9월 1심에서 "사용자의 우월적 지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악용했다"며 임직원 6명에게 징역 10개월~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3년, 벌금 1천만 원 등을 선고했다. 2심도 이들을 유죄로 판단하며 형을 확정했고, 고용노동부는 기업노조 설립을 취소했다. 하지만 사측은 제3의 기업노조를 만들었고 대양판지는 금속노조와 기업노조와 각각 개별교섭을 진행했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권오산 국장은 "기업노조가 조합원이 더 많았다면 또다시 교섭권을 뺏겼을 것"이라며 "대양판지가 현재 법 체계로는 사업주의 부당 노동행위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노조파괴' 사업장으로 알려진 유성기업의 경우,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가 과반수 노조로 교섭대표노조가 될 수 있지만, 사측이 기업노조와 개별교섭을 진행해 교섭권을 제약하기도 했다. 기업노조와 먼저 타결한 협상 결과가 사실상 가이드라인처럼 작용해 이를 넘어서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된다는 게 금속노조의 설명이다.

이처럼 2011년 복수노조 설립 허용으로 도입된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사용자의 노동조합 탄압 전략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쟁의행위 손배소 대응 시민단체 '손잡고' 윤지선 활동가는 "회사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랑은 단체협약 체결을 안 해주면서 1년만 버티면 교섭 지위를 박탈시킬 수 있다"며 "회사가 설립한 어용 노조랑 빠르게 단체협약을 체결하면 직원들은 어용 노조에 가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기존 민주노총은 교섭권도 잃고 노조도 점점 축소돼 다시 교섭권을 얻기 쉽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손잡고 운영위원 송영섭 변호사는 "회사가 원하지 않는 노조가 다수 노조일 경우 개별 교섭을 통해 회사가 원하는 노조에도 교섭권을 주는 방식이고, 회사가 원하는 노조가 교섭대표노조가 됐다면 개별교섭에는 동의를 안 할 것"이라며 "회사가 개별교섭에 대한 선택권을 가진 것 자체도 독소조항"이라고 설명했다.

송 변호사는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창구 단일화 절차를 진행하는 기구를 (회사가 아닌) 제3의 독립적인 기관이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현행법 제도 하에서 (교섭권 침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법 해석을 통해서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며 "교섭권을 침해하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유형화와 그에 대한 처벌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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