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들은 각 무죄"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의 '최정점'으로 불리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지난 26일 흔히 말하는 '통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일과 중에 선고가 마쳐질지는 미지수"란 말로 입을 뗀 재판부. 창문 하나 없는 법정에선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4시간 30여 분의 재판이 끝나자, 바깥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선고 후 일주일 넘게 흘렀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재판부가 법원행정처의 일부 재판 개입과 법관 독립성 침해 행위를 인정했지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너무 엄격히, 좁게 해석했단 논란이 가장 큽니다.
행여 직권남용을 인정하더라도 '윗선'인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까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지점도 '대법원장의 지시와 승인 없이 이같은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남깁니다.
"부적절한 재판개입이지만, 권한 없으니 남용도 없다"
재판부는 공소사실별로 ①직무권한이 있는지 ②직권을 행사했는지 ③남용했는지 ④양 전 대법원장 등과 공모가 있었는지 순서로 유죄 여부를 따졌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공소사실이 직권남용조차 인정되지 않았고, 행여 남용이 인정되더라도 "증거부족" 등을 이유로 피고인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 일반적 직무권한과의 관련성에 근거하여 직권의 월권적 남용을 인정할 경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처벌범위가 부당하게 확대될 위험이 있고 추상적인 개념인 '관련성'을 기준으로 범죄의 성립 여부를 인정하는 것은 자의적인 법집행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일반적 직무권한과 관련성이 있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의 필요성이 있다면 이는 별도의 처벌규정을 신설하여 적용하는 것이 죄형법정주의의 원칙과 권력분립의 원칙에 비추어 타당하다. (중략)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관하여 사법행정권자인 피고인들의 직무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 직무권한의 존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성립을 위한 전제 조건이므로,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한 직무권한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이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 |
한 마디로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없다'는 취집니다. 애초부터 양 전 대법관 등 피고인에겐 다른 법관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다고 봤습니다. 이 논리로 '재판개입'을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 혐의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부산고등법원 판사 비위 은폐 사건 △매립지 귀속 분쟁 사건 △위헌법률심판 제청 결정에 직권취소 및 재결정 의견을 전달한 사건 등에선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의 재판개입이 있었다고 봤습니다.
2016년 법원행정처는 부산고법 문모 판사가 한 건설업자 항소심 관련 재판 정보를 외부에 유출했단 의혹을 알게 됩니다. 문 판사가 해당 건설업자로부터 뇌물까지 받았단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죠. 이른바 판사 비위 은폐 사건은 고 전 대법관이 부산고법원장에게 전화해 "문 판사가 2017년 초 정기인사에서 사표를 낸다고 하니 그 이후에 선고가 됐으면 좋겠다. 이를 담당 재판장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는 게 골자입니다.
재판부는 "부적절한 재판관여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판시하면서도 고 전 대법관에겐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존재하지 않으니 남용도 불가하다고 봤습니다. 재판장의 독립된 재판권 행사가 침해받지도 않았으며 양 전 대법관이 가담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고 전 대법관의 부산고등법원장에 대한 위와 같은 요청은 부적절한 재판관여를 요청하는 행위이긴 하나, 부산고등법원장이 위 요청을 항소심 재판장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 전 대법관에게는 항소심 재판장의 재판권에 대한 일반적 직무권한이 인정되지 아니하여 고 전 대법관이 직권을 남용하였다고 볼 수 없고, ② 전 경찰청장 등 형사사건의 항소심 재판부가 변론 재개, 추가 공판기일 진행, 선고기일 연기 등의 절차를 거쳐 판결을 선고하였다고 하더라도, 재판장의 재판권 행사가 방해되었다거나 재판장이 의무 없는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중략) ③ 양 전 대법관이 고 전 대법관 및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부산고등법원장을 통한 항소심 재판장에 대한 위 요청 행위에 가담하였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 |
"직권남용이지만, 양 전 대법관까지 연결고리는 없어"
직권남용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법원이 남용을 인정한 사례도 있습니다.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일부 재판 개입 △파견 법관을 이용한 헌법재판소 내부 사건 정보 및 동향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와해 시도 등에서 실무자들의 직권남용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례로 국제인권법 연구회 및 인사모 와해 의혹에선 임 전 차장의 직권을 남용해 심의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봤습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법관의 표현의 자유와 연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위법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법령준수의무가 있는 심의관이 위법한 보고서를 작성할 의무는 없다고 할 것이어서 심의관이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어렵사리 직권남용이 인정되더라도 갈 길은 멉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하급자인 임 전 차장 등 실무관이 직권을 남용해 직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더라도, 정작 양 전 대법원장과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른 행위가 아니란 판단입니다.
특히 인사모 와해 의혹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의 공모 관계가 입증이 안 된 데는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당사자인 임 전 차장이 자신의 재판을 이유로 법정 증언을 함구한 탓이 컸습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① 양 전 대법관이 증인에게 국제인권법연구회 문제와 관련하여 '후임자에게 부담을 넘기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 사실이 있는지, ② 증인이 실장 회의에서 양 전 대법관으로부터 들은 '국제인권법연구회 문제는 내 임기 중에 정리를 해야 한다.(중략)③ 양 전 대법관이 증인에게 인사모의 공동학술대회 개최와 관련하여 대응책 마련을 지시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라고 말을 한 사실이 있는지(중략)각각의 물음에 대하여 증언을 거부하였다. |
그렇게 '책임'은 임 전 차장 선에서 그치게 됐습니다. 비록 임 전 차장의 사건을 심리하는 담당 재판부는 아니지만,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가 임 전 차장의 재판 개입과 권한 남용을 일부 인정했기에 오는 5일로 예정된 그의 선고 결과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재판부가 임 전 차장의 평소 업무 스타일을 예로 들며,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강제징용 재판 개입 등의 의도나 목적이 옅다고 '세심하게' 고려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임 전 차장의 평소 보고서 검토·작성 지시에 관한 업무 스타일 등에 비추어 보면, 임 전 차장은 사법부를 둘러싼 다양한 현안 등과 관련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또는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방향 등을 그대로 반영하여 보고서 형태로 작성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보고서를 추후에 어떤 용도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전에 명확히 정해놓지 않은 채 심의관들에게 일단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중략)2014. 11. 10.자 시나리오 보고서 역시 이러한 의도 하에 그 작성을 지시한 것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
강제징용 두고 양승태 "잘 알겠다"…법원 "수동적 답변일 뿐"
이처럼 재판부는 유독 법원행정처의 강제징용 재판 개입 여부를 따질 때 넉넉한 이해를 보였습니다.
재판부는 2014~2016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이 대법원 재상고심에 올라가자,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만나 대응 방안을 고심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당시 김앤장은 일본 기업 측 소송 대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이들은 2012년 대법원의 피해자 승소 판결을 뒤집고자,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이를 계기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도록 전략을 짰다는 겁니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 김앤장의 송무팀 소속 한상호 변호사가 사석에서 세 차례 만났다고 봤습니다. 한 변호사가 전략을 재확인하면서 진행 상황을 말하자 양 전 대법원장이 "그러냐, 잘 알겠다", "잘 되겠지요"라고 말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검찰은 이 부분을 양 전 대법원장의 인지 혹은 승인이라고 봤지만, 재판부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하는 뜻"이란 양 전 대법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동적인 답변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검찰은 이 부분을 양 전 대법원장의 인지 혹은 승인이라고 봤지만, 재판부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하는 뜻"이란 양 전 대법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동적인 답변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2024.01.26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1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판결문 中 |
2015. 5.경의 양 전 대법원장과 한 변호사와의 회동에서의 양 전 대법관의 '그러냐, 잘 알겠다'라는 발언은 이 무렵 임 전 차장으로부터 위와 같은 연락을 받은 한 변호사가 먼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외교부 의견서 제출과 관련하여 임 전 차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대로 진행을 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언급일 뿐인바 (중략)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받아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는 것이 양 전 대법원장의 방침 내지 결심에 따른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거나, 외교부 의견서 제출 문제와 관련하여 임 전 차장이 한 변호사에게 접촉하여 알려준 위 내용을 이미 공유한 상태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나아가 재판 계속 중인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한 전원합의체 회부 계획 등 구체적인 심리 계획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
재판부는 이같은 '세심함'을 선고 당일 법정에서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직후 재판부는 "검사님 등 여러 변호인들께 감사드린다. 오랜 기간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들에겐 고생했다는 말씀드린다"고 말한 후 법대를 내려갔습니다.
4년 11개월의 재판에 피고인들이 많이 지치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럼에도 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 국민의 마음은 누가 헤아려줄까요. 이들이 무죄를 받았다고, 초유의 사법 행정권 남용 사태가 없던 일이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