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아임 피어리스'(IM FEARLESS)의 글자를 재조합해 탄생한 팀명처럼 여성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표방한다.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거침없이 나아가겠다고. 이때, 앨범 발매 전 공개하는 짧은 영상 '트레일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 월드 이즈 마이 오이스터'(The World Is My Oyster)부터 '더 히드라'(The Hydra), '번 더 브리지'(Burn the Bridge)까지 르세라핌의 트레일러는 그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를 시각(영상)과 청각(음악)적으로 충실히 구현하고자 한 결과물이다.
세 번째 미니앨범 '이지'(EASY) 발매를 앞둔 르세라핌은 지난달 26일 새로운 트레일러 '굿 본즈'(Good Bones)를 공개함으로써 '이지'의 시작을 알렸다. 르세라핌의 김채원, 사쿠라, 허윤진, 카즈하, 홍은채 다섯 멤버는 이번에도 본인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우리가 하는 게 쉬워 보이겠지만 사실 쉽지 않다'는 내용이다. "내가 또 기회를 잡아서 기분 나쁘니?" "나만 계속 운이 좋은 거 같아서 화가 나니?" "세상이 우리한테만 쉬운 것 같니?" 등 이전보다 더 세고, 어쩌면 공격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지, 크레이지, 핫 아이 캔 메이크 잇'(EASY, CRAZY, HOT I can make it)이 반복되는 하드 록 장르의 강렬한 음악과, 비비드하면서도 과감한 의상, 레이저 빔으로 벽과 벽을 뚫고 끝내 코피를 흘리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고루 어우러진 트레일러 '굿 본즈'. CBS노컷뉴스는 데뷔 때부터 르세라핌의 모든 '시각 콘텐츠'를 총괄해 온 김성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를 통해 이번 트레일러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지난달 31일 서면으로 이루어졌다.
김 디렉터의 표현을 빌리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앨범의 콘셉트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뮤직비디오, 콘셉트 포토, 앨범 아트웍, 아티스트 비주얼, 무대 콘셉트, 브랜드 익스피리언스(BRAND EXPERIENCE, BX) 등을 총괄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피어리스'(FEARLESS)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 '언포기븐'(UNFORGIVEN)까지, '두려움 없고' '충격을 가할수록 강해지며' '용서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이야기한 르세라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직관적인 제목의 '이지'(EASY)로 컴백을 예고했다. 트레일러보다 일찍 공개된 로고 모션 영상에서 르세라핌 로고는 작은 점 형태로 바뀌었다가 곧은 직선으로 변해 앞을 향해 뻗는다. 이후 짧아진 직선은 '메이크 잇 룩 이지'(MAKE IT LOOK EASY)의 '잇 룩' 부분을 가리고, 남는 글자는 '메이크 이지'(MAKE EASY)뿐이다.
"르세라핌의 당당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과 고민을 이번 앨범의 비주얼 콘텐츠를 통해 르세라핌스럽게 풀어내고자 했다"라는 김 디렉터는 "'거대한 목표 지점, 이상향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작은 점으로 보일 뿐' 내러티브를 이지(easy)하게 로고 모션으로 표현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앨범 '이지'가 말하고자 하는 양면성, 즉 '겉으론 쉽게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쏟은 노력으로 쉽게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을 로고의 원초인 삭선을 통해 표현했다"라고 부연했다.
김 디렉터는 "르세라핌의 앨범 트레일러는 늘 그 앨범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번에도 앨범과 타이틀곡의 메시지를 영상에 녹였다"라고 밝혔다. 데뷔 트레일러부터 꾸준히 등장한 워킹 장면을 두고 "기존의 당당한 르세라핌이 떠오르지만"이라고 운을 뗀 그는 "계단에서 구르거나 코피가 나는 장면은 그 당당함 뒤에 있는 고민과 어려움,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노력 같은 걸 의미한다"라고 전했다.
그중에서도 사쿠라가 벽을 뚫는 장면이 핵심이다. 김 디렉터는 "벽을 마주한 사쿠라가 레이저로 벽을 뚫는 장면이 르세라핌이 어떠한 그룹인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해서 가장 강조하고 싶었다. 한계나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이를 무너뜨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면서도 이번 앨범의 메시지와 맞게, 벽을 무너뜨리기 전까지의 노력과 고민, 얼마나 힘썼는지를 코피 흘리는 장면으로 설명해 봤다"라고 전했다.
이전 앨범과 연결해 볼 수 있는 유기성도 '굿 본즈' 트레일러에 담겨 있다. 전작 '언포기븐' 뮤직비디오에서 불타는 한쪽 날개를 스스로 떼어낸 카즈하는, 이번 트레일러에 날개 반쪽만을 지닌 채로 나타난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자, 김 디렉터는 "앨범마다 날개의 변화로 연계성을 줘 매 순간 성장하는 르세라핌을 표현하면 재밌겠다 싶었다"라고 답했다.
트레일러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의상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야광 점퍼부터, 강렬한 색감이 두드러진 긴 유광 패딩, 속옷으로 보일 만큼 짧은 바지, 일상적이지 않은 느낌의 드레스, 검은색 계열의 간편복(원마일웨어) 등 성격과 재질이 각양각색이었다. 트레일러 공개 후 일부 의상이 선정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멤버별 의상이 정해지게 된 과정과 스타일링 배경을 묻자, 김 디렉터는 이번 트레일러를 연출한 유광굉 감독의 스타일부터 언급했다.
그는 "유광굉 감독님은 비디오 색채가 강렬하고, 연출이 과감하면서 위트 있다. 낡은 상가, 어두운 지하실 등 트레일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주는 힘과 대비되는 의외성이 가미된다면 좀 더 재밌는 영상이 될 거라 생각했고, 트레일러에서 부여된 각 멤버 캐릭터를 고려해서 스타일링해 봤다"라고 밝혔다. 트레일러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촬영했다. 김 디렉터는 "험블(humble, 초라한)한 곳을 자신 있게 걷는 모습이 이번 트레일러의 전체적인 기획 의도와 잘 맞는다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CF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유광굉 감독은 그동안 아이브 '이더 웨이'(Either Way) 뮤직비디오와 엔하이픈 미니 4집 '다크 블러드'(DARK BLOOD) 및 미니 5집 '오렌지 블러드'(ORANGE BLOOD) 트레일러를 작업한 인물이다. 함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김 디렉터는 "평소 유광굉 감독님의 작업물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이번 앨범을 이지하고 쿨하게 표현해 주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협업하게 되었다"라고 답했다.
트레일러를 만들 때 음악을 먼저 정하고 비주얼을 구현하는지, 이미지부터 잡고 알맞은 곡을 정하는지 순서가 궁금했다. 이에 김 디렉터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경우에 따라 다르다)이긴 하지만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앨범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오면 그 메시지를 어떻게 함축적으로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르세라핌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즐거워하는 팀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하기 때문에 특정 음악 장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트레일러에 들어가는 음악은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음악 프로듀서에게 제안을 하기도 하고, 전체 앨범의 메시지에 맞게 서로 상의를 한 뒤 프로듀서가 최종 결정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