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결함 너머 '사람' '사랑'을 긷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엔케이컨텐츠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임선애 감독 작품 '69세'와 '세기말의 사랑'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인물을 발견하고,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세기말의 사랑'에서 유진은 임 감독의 막내 이모로부터 발아된 캐릭터다. 유진과 같은 근육병을 앓는 임 감독의 이모는 예쁘고, 취향도 정확하고, 까탈스러운 면도 있다. 이모를 수식하는 단어에 '장애'가 하나 추가됐을 뿐 이모는 이모다. 변함없이 그대로다. 임 감독은 장애인의 삶은 불행할 거라고 판단하는 선입견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선은 영미, 도영에게도 담겨 있다.
 
영화 속 영미와 유진, 도영은 다들 상처와 결핍이 있고 또 이를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온몸으로 받아내고 견뎌낸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닮은 듯 다른 상대를 안아준다. 그리고 이 인물들의 내면에는 '사랑'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진 바람과 세찬 파도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세기말을 넘어 새천년을 맞이한다.
 
임선애 감독이 '세기말의 사랑'을 통해 포착한 영미와 유진, 도영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 각자 '세기말'과 '위장 결혼'이라는 명분을 통해야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와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

 
임선애 감독이 본 두 인물은 여러 가지 결함과 결핍의 상황에 처해 있지만, 스스로 주눅 들거나 자격지심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게 유진의 조카 미리를 찾다가 길을 잃어버린 둘이 다투는 장면이다. 유진이 영미에게 자신과 있으면 우월감이 들어서 좋지 않냐고 하자 영미는 유진을 향해 "넌 예쁘잖아"라고 맞받아친다. 임 감독은 "그게 두 사람"이라고 했다.
 
"영미는 유진을 장애인으로 본 게 아니라 자신보다 예쁜 여자라고 본 거죠. 자기는 세기말이라 불리는 외모로 도영을 좋아했는데, '나보다 훨씬 예쁘고 멋진 여자랑 결혼했다고?' 이런 느낌인 거죠. 우월감이란 말은 영미가 했을 법한 말인데 유진이 한 거예요."
 
영미는 처음으로 자신도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다. 유진은 항상 자기를 장애인으로만 바라보는 걸 느끼다가 영미가 예쁘다고 응수하자 놀랐을 거다.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가진 결함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봐요. 남들은 그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두 사람은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서로의 반짝거림, 내면의 상냥함을 발견하고, 결국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모든 아픔과 결핍을 딛고 일어나게 하는 힘은 '사랑'과 '상냥함'이다. 사랑과 상냥함의 힘으로 영미는 영화 후반 차도 마시고, 네일아트도 하고, 창밖으로 사람 구경도 한다. 임 감독은 "한바탕 여행하고 돌아온 영미의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명분에서, 불편한 동거에서 사랑으로

 
영미와 유진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 단어가 바로 '사랑'이다. 우선 두 사람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만난 사이다. 한 사람은 짝사랑, 한 사람은 위장 결혼으로 말이다.
 
유진의 위장 결혼은 일종의 '명분'이다. 유진은 도영을 좋아하지만, 그의 인생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위장 결혼을 제안한다. 도영 역시 유진을 좋아하지만, 빚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에 감히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진심을 감춘 둘은 명분을 부여잡았다.
 
그런 둘의 사랑을 드러내는 단어는 바로 '안심'이다. 유진은 도영에게 "네가 말한 그 이상한 여자를 만났었어. 처음으로 네가 안심이 되더라"라고, 그런 유진을 향해 도영은 "저는 유진씨가 안심이 안 돼요"라고 답한다. 임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사랑을 쟁취하는 것도 용기지만, 포기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두 사람은 각자 안에서 용기를 낸 거죠."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세기말의 사랑' 안에는 유진과 도영의 사랑, 도영을 향한 영미의 사랑도 있지만, 영미와 유진의 사랑도 있다. 이는 유진과 영미가 도영을 바라보는 사랑과는 다른 결의 '사랑'이다.
 
출소한 후 모든 것을 잃은 영미에게는 살 곳이 필요했고, '지랄 1급'으로 소문난 유진에게는 돌봄이 필요했다. 도영이 다리를 놔준 셈이다. 주거와 돌봄이라는 '명분'을 바탕으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삶과 사랑을 회복한다.
 
그런 점에서, 욕실에서 영미가 그동안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던 화상 자국을 유진에게 드러내는 장면은 중요하다. 앞선 유진의 사연과 이어진 욕실 장면은 서로의 밑바닥을 내보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비로소 같은 선상에 서게 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미가 유진의 손을 빌려 자신의 상처를 처음으로 보듬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게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영미와 유진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친밀감으로 표현하는 사랑인 거 같아요."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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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상대 도영

 
사랑하는 유진을 위해 공금 횡령까지 하게 된 도영은 분명 흔치 않은 인물이다. 구내식당에서 '세기말'이라 놀림 받으며 반찬도 챙기지 못한 영미를 위해 도영은 슬쩍 자신의 몫을 나눠준다. 대관람차를 타봤냐는 유진의 질문에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못 탄다고 하는 게 도영이다.
 
"사실 시나리오에는 그런 도영의 면면이 드러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걸 노재원 배우의 얼굴과 연기가 그냥 해결해 주더라고요. 전 그런 확신으로 캐스팅했지만, 처음 대본 리딩 때는 스태프들은 물론 배우들도 노재원 배우를 잘 몰랐어요. 그런데 첫 리딩 후 다들 왜 제가 맨날 노재원을 이야기했는지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역시나 현장에서도 정말 잘해줬어요."
 
그러나 혹자는 도영을 두고 '판타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임 감독은 '69세' 속 남동인(기주봉)을 예로 들었다.
 
"제 아버지나 남편이나 권위적이지 않아서 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고 만든 건데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 어딨어?'라고 했어요. 보통 '아버지'를 그린다고 하면 대부분 가부장적으로 그리잖아요. 그런데 전 그것도 일종의 학습된 이미지 아닌가 싶어요. 저는 웬만하면 인물들을 그릴 때 다른 각도에서 그리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렇기에 동인도, 도영도 자연스럽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또 분명 세상에는 동인과 도영 같은 인물이 당연히 있을 거라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인물이 세상에 있다는 게 영화로라도 대리만족이 되면 마음이 따뜻하지 않을까요?"(웃음)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에필로그> 상징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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