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임선애 감독이 '세기말의 사랑'을 흑백과 컬러로 나눈 이유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엔케이컨텐츠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임선애 감독의 첫 영화 '69세'는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69세 여성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폭력과 편견에 맞서 나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피해자가 더 고통받고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자 한 걸음 나아간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용기를 전했다. 또한 작품을 향한 다양한 시선은 그 자체로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현실을 이야기했다.
 
'69세'의 임선애 감독은 영화의 소재와 인물만으로도 관객들이 영화관 밖으로 작품과 작품의 메시지를 가져가게끔 하는 힘을 보여줬다. 감독의 신작 '세기말의 사랑' 역시 세상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이유영)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임선우)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따뜻한 용기와 위로를 전한다. 극장을 넘어서 말이다.
 
이처럼 임선애 감독은 흔히 우리가 연민과 불행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물을 통해 고민을 이어가게 한다. 또 이러한 시선을 벗어나는 인물을 통해 용기와 희망, 다정함이라는 따뜻한 감각을 일깨운다.

과연 이번 '세기말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해 지금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지,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번째 영화를 들고 온 임 감독은 멋모르고 했던 첫 번째 영화와 달리 '세기말의 사랑'은 개봉 전까지 악몽을 꿀 정도로 불안과 부담이 있었다고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세기말'적인 영미에서 시작된 '세기말의 사랑'


이름은 '김영미' 별명은 '세기말'인 칙칙한 주인공의 뉴 밀레니엄 시대, 컬러풀한 인생을 향해 전진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기말의 사랑'의 시작은 사실 '세기말'이 아니었다. 임선애 감독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시나리오로 썼던 게 초고다. 제목도, 배경도 달랐던 '세기말의 사랑'이 다시 빛을 본 건 '69세' 이후 두 번째 작품을 고민하면서다.
 
임 감독은 "다른 작품 제안도 있었는데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몰입해서 내가 신나게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어서 10년 전 나한테는 미완성이었던 시나리오를 고민하게 됐다"며 "이걸 고칠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지만, 영미 캐릭터를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고 수정 작업이 시작된 계기를 설명했다.
 
영화 초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미는 홀로 큰어머니를 부양하고 있다. 아마 어릴 적 큰어머니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자랐을 것이고, 각박하게 살며 자기 삶을 자기가 선택해 살아 온 인물이 아니라고 봤다. 그런 영미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큰 계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세상이 멸망할 정도의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거였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그리고 영미에게 별명이 하나 있길 바랐다. 흔히 외모가 못생겼다고 할 때 말하는 안 좋은 별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세기말'이었다. 영미의 외모가 제대로 정착돼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혼란스럽다는 느낌에서 '세기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별명을 짓자 자연스럽게 '시대 배경도 세기말로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결국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세기말이란 별명을 가진 주인공의 세기말 시대 이야기,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 이야기로 가면 좋겠다고 해서 시대를 더 역행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작품들(사진 위)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작품. 컬처앤아이리더스, 베른 박물관, 국제 예술갤러리 제공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작품 색을 닮은 '세기말의 사랑'

 
임 감독은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작품의 '무드'를 이미지로 찾아가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드 전에 색감을 먼저 정하는 편이긴 하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에 따르면 첫 영화 '69세'는 피카소의 '청색 시대'(1901~1904년를 일컬으며, 주로 짙은 파란색이나 청록색을 사용했다)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주인공 효정(예수정)의 이미지가 '청색 시대'가 가진 모노톤의 서늘한 블루가 가진 느낌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면서 영화의 시간적 배경도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 싹이 트지 않는 계절이 됐다. 임 감독은 두 번째 영화는 어떤 작품이 될지 몰라도 총천연색이 나오는 '여름'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정해진 상황에서 평소 레퍼런스를 모아놓은 폴더를 열었다. 임 감독은 "마리아 스바르보바(슬로바키아 출신 사진작가로 '스위밍 풀 시리즈' '더 게임 시리즈' 등으로 유명하다) 사진 색감을 좋아해서 많이 모아 놨었다"며 "촬영감독과 이번 영화 색감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촬영감독도 마리아 이야기를 하더라. 원색보다는 파스텔톤에 가까운 비비드한 색으로 보색 대비를 해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그렇게 1막은 흑백으로, 2막은 비비드한 컬러로 구성했다. 임 감독은 "무채색의 삶을 살았던 영미가 새천년이 되면서는 본인이 짊어진 짐을 다 내려놓는다. 공금 횡령을 방조한 죄도 형량을 다 마쳤다"며 "땡전 한푼 없고 다 잃었지만 이제 맘대로 살아도 되는, 그런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2막에 나온 영미의 핑크색 운동화도 의도했던 거다. 1막에서도 봤던 운동화인데, 그때는 관객들이 '흰 운동화가 더러웠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사실 핑크색 운동화였던 거다. 영미의 옷과 가방도 모두 컬러풀한 의상과 가방들이었던 것"이라며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색감을 일부러 구분했다"고 말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엔케이컨텐츠 제공

'사랑'과 '상냥함'이란 끝이자 시작

 
아마 모든 감독의 공통된 고민은 영화의 방향성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오프닝과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엔딩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일 테다. 임 감독 역시 "난 진짜 첫 장면과 끝 장면을 너무 신경 쓴다"고 했다. 끝 장면을 만들지 않으면 시나리오를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끝 장면이 있다는 건 이야기가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지 내가 명확하게 정리했기에 끝 장면을 쓸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며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계속 떠올리며 생각하기 마련이고, 보통은 아이템을 생각할 때쯤 끝 장면을 떠올린다. 그래야 뭐든 쓸 수 있겠더라"고 했다.
 
아무리 영화의 처음이 좋고 중간이 재밌어도 끝에 가서 결말이 생각보다 시시하거나 너무 열려 있으면 관객들이 앞을 재밌게 봐놓고도 엔딩 크레딧조차 보지 않고 일어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임 감독은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 오프닝과 엔딩을 중요시한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세기말의 사랑' 첫 장면도 시나리오상 첫 장면과 다르다. 영화는 영미가 유리창에 그린 하트 사이에 들어온 도영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임 감독이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오프닝을 보면 아무런 설명을 안 해도 영미가 도영을 되게 좋아한다는 생각을 장착하고 시작하게 된다. 그게 많은 설명을 넘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임 감독의 졸업 시나리오에 담겼던 이야기가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며 '세기말의 사랑'으로 완성됐다.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작품 색을 닮은 영미의 세상과 사랑은 관객들과 만나 어떤 색을 지니게 될까.
 
"'세기말의 사랑'은 결핍과 결함, 상처를 가진 불완전한 사람이 나와 같은 불완전한 사람을 만나서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사실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건 되게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 기저에는 사랑과 상냥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끝내 사랑과 상냥함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죠. 관객들도 영화를 보시고 자신 안에도 주인공들과 같은 따뜻함과 상냥함이 있다는 걸 느끼면 좋겠어요."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하> 캐릭터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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