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76)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67)·고영한(69) 전 대법관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관련자들이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법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최정예 부대라는 서울중앙지검 소속 특수부 인력을 대거 투입한 검찰로서는 잇단 무죄 판결로 무리한 수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당시 수사 지휘 라인은 윤석열 대통령(당시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당시 중앙지검 3차장검사), 신자용 대검찰청 차장검사(당시 중앙지검 특수1부장검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26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박·고 전 대법관도 무죄를 받았다. 검찰 기소 후 1811일(약 4년 11개월) 만이다. 박·고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각종 재판개입 및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헌법재판소 견제, 비자금 조성 등 47개 범죄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앞선 결심 공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징역 7년,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대법관에게는 각각 징역 5년과 4년을 구형했다.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의 무죄 선고는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한 윤 대통령의 책임론과 맞닿는다. 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실무 책임자는 수사팀장을 맡은 한동훈 3차장이었고, 신자용 특수1부장이 수사 전반 실무를 맡았다.
검찰은 수사 개시 한 달만인 2018년 7월 2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압수수색했고 그해 10월 27일 임 전 차장을 구속했다. 같은 해 11월 1일 박 전 대법관을, 이어 같은 달 23일 고 전 대법관을 소환했다. 이듬해 1월 11일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그는 2주 뒤인 1월 24일 구속됐다. 사법부 수장을 지낸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수감된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은 모두 14명이다. 양 전 대법원장 외에 임성근·신광렬·조의연·성창호·유해용·이태종 등 전·현직 판사 6명은 무죄가 이미 확정됐다.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도 하급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상고심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지시로 사법농단 실무를 도맡았다는 임 전 차장의 1심 선고는 다음 달 5일 예정돼 있다. 하급심에서 일부라도 유죄를 받은 피고인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뿐이다. 이들은 항소심에서 각각 벌금 1500만원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법조계에선 연이은 무죄 선고가 검찰의 부실수사 및 무리한 기소를 방증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법원이 "직권 없이는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무죄 이유를 밝힌 점을 들어 기소 당시 법리 검토가 공정하고 촘촘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반대로 수사 당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발부했던 법원이 태도를 바꿔 무죄를 선고한 것을 두고 '제식구 감싸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법관들의 위법성을 법원 스스로 단죄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검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불복하겠다는 분위기가 읽힌다. 서울중앙지검은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1심 판결과 관련해 사실 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히 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