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관리 매뉴얼이요? 사고 나면 119 부르면 되죠."
CBS취재진이 지난 24일 찾은 서울 중구의 한 인쇄업체. 이곳에서 만난 직원은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회사가 마련한 매뉴얼이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뜬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바로 옆 다른 직원들은 보호장갑도, 안전모도 없이 목재를 톱날로 자르고 있었다.
오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에 확대 적용을 앞둔 5인 이상 50인 미만 중소 사업장은 아직도 새롭게 바뀔 '중처법 시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 24일, 고용노동부에서 제공하는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관리체계 가이드북'의 점검항목표(체크리스트)를 손에 쥐고 서울 시내 일대의 중소 사업장들을 방문했다.
방문한 사업장 대표·노동자와 함께 중처법 준비상황을 점검해본 결과, 대부분 사업장은 준비가 부족한 수준을 넘어 자신들의 사업장이 중처법 적용 대상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서울 중구에서 만난 한 인쇄업체 직원 3명은 자신들이 일하고 있는 사업장에 대해 체크리스트에 담긴 총 10가지 항목을 살펴보다 3~4가지는 '만족하지 못한다'에 표시했다.
이들은 '사업장 내 위험기계·기구, 유해·위험 화학물질, 위험장소 등에 대한 리스트를 관리한다', '사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해 시나리오와 이에 대한 대응방안을 1개 이상 작성한다', '도급·용역·위탁 업체 선정 시, 수급인 등의 안전보건 수준을 고려해 선정하는 절차가 있다' 등 3가지 항목에는 모두 '아니오'라고 답했다.
또 이들 중 2명은 '산업안전보건법 등 안전보건 관계 법령의 준수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다'는 항목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 회사 직원 정모씨는 "아직 매뉴얼은 없다. 이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당 업체 사장인 안모씨는 "매뉴얼은 없어도 수시로 교육도 하고 관계 기관에서 와서 교육자료를 주고 있다"며 "우리 사업장에서는 큰 사고가 날 일이 없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오너가 사고로 구속이 된다면 사업장을 더 이을 방법이 없다"며 "대비가 부족하다고 하면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걱정했다.
아예 자신의 사업장이 중처법 적용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오는 27일부터 확대되는 중처법은 업종과 상관 없이 5인 이상 50인 미만 규모인 모든 사업장에 적용된다.
서초구 교대역 인근 헬스장 직원들도 자신의 사업장이 중처법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헬스장 사장 A씨는 중처법에 대해 "무슨 법인가?"라며 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어 "그건 (공사장처럼) 현장이 있는 업장에서만 적용되는 법 아닌가"라며 "27일부터 적용되는 것도 아예 몰랐다"고 말했다.
A씨는 체크리스트를 보여주자 "체크리스트를 처음 본다. 이걸 어떻게 다 확인하느냐. 정부에서 상담해 준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며 헛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초구의 한 호프집 사장 B씨는 "(중처법에 대해) 뉴스에서 보기는 했다"면서도 "어떻게 준비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사고가 안 났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비교적 사고가 날 위험이 높은 업종의 사업장도 준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등포구의 한 철강 사업장에서는 직원들이 레이저기를 이용해 금속판을 절단하고 있었다. 몸의 3배가 돼 보이는 유압 프레스기 앞에서 용접하는 직원도 보였다.
이처럼 안전사고 위험을 코앞에 둔 직원들도 중처법에 대해 무관심했다. 이곳 직원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며 "(안전보건은) 사장이 책임지는 것 아닌가. 나는 하청 직원일 뿐이다"라고 반문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중대산업재해? 그래서 뭘 준비하나?
취재진이 찾은 중소 사업장들은 대부분 중처법 적용 사실을 알려주면 '이제부터 사고가 나면 당장 처벌받는 것이냐', '준비는 무엇을 얼마나 해야 되는 것이냐', '준비 방법은 어디서 볼 수 있냐' 등 막연한 두려움을 호소했다.
우선 중처법은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 및 보건을 확보하도록 경영책임자에게 의무를 부과한 법률이다. 따라서 경영책임자가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다하지 않은 이유로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관련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있다.
'중대산업재해'는 산업재해 중에서도 경영책임자를 따로 처벌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재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 △동일한 유해요인의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 3명 이상 발생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중처법은 오는 27일부터 5인 이상 중소 사업장이라면 모든 업종·직종에 적용된다. 쉽게 말해 건설·제조업뿐 아니라 사무업도, 음식점도, 헬스장도 포함된다. 다만 중대재해 사망사고의 대부분은 건설·제조업종에 집중돼 있고 음식점 등의 중대재해 사례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물론 업종에 관계없이 중소 사업장도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노동부의 가이드북에 따르면 △재해 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 △재해 발생 시 재발방지대책의 수립 및 이행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가 관계 법령에 따라 개선 시정 등을 명한 사항의 이행 △안전·보건 관계 법령상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 조치를 해야 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전혀 새로운 규정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이미 규정돼 있다. 다만 중처법이 적용되면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의무의 주체로 보다 명확해지고,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이들에 대한 처벌도 강화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중소 사업장조차 안전관리자를 새로 고용해야 하느냐'는 의문도 나온다. 하지만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안전관리자나 보건관리자를 따로 배치해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제조업, 임업, 하수·폐수 및 분뇨처리업, 폐기물 수집, 운반, 처리 및 원료재생업, 환경정화 및 복원업에 한해서는 20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은 안전보건관리 담당자를 1명 이상 선임하도록 본래부터 산안법에 규정돼 있다.
비록 2022년부터 중처법이 도입됐고, 그동안 정부가 50인 미만 취약 사업장 83만 7천여 곳에 컨설팅 등 지원을 해왔다지만 여전히 중소 사업장은 준비가 미흡한 것도 현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중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는 당장 자신의 사업장이 중대재해에 대한 안전 관리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마땅히 없다. 사업장의 안전 관리 여부를 공시하는 등 관련 제도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동부 관계자는 "기업이 자체적으로 설문조사 방식으로 사업장의 안전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산업안전 대진단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향후 중처법이 확대 적용되면 지방 관서를 통해서 설명회를 할 계획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