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의 공신인 이괄의 난을 배경으로 그 주변인물들이 펼쳐가는 정통 역사 웹툰 '칼부림'이 10년 간 이어온 연재 대장정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철저한 역사 고증과 필묵으로 직접 그리는 아날로그 화법으로 화제를 모은 '칼부림'은 세밀한 시대상을 묘사한다. 장르가 편중되고 있는 웹툰계에서 보기 드물게 정통 역사를 다룬 현대적 사극 만화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 고증이 치밀하다 보니 연재 초기부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괄을 미화한다거나 항왜나 북방 민족들이 등장하는 것을 두고 역사인식이 부족하거나 자국중심적 사관에 머무른 일부 독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역사 기록과 작품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논란 자체는 무의미한 수준이다. 오히려 판타지나 단순한 재미에서 벗어난 다소 무거운 정통 역사 만화라는 이유로 '볼거리'를 찾는 젊은 독자층의 외면을 받는 것이 사소한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2012년 도전만화 연재와 베스트 도전만화, 공모전을 거쳐 2013년 12퉐 네이버웹툰에 정식 연재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웹툰 작가들이 태블릿과 같은 디지털 도구로 그리는데 반해 종이와 필묵으로만 그린다. 역동적이면서도 세밀한 묘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평은 여전하다.
고 작가는 "디지털 기술로 얼마든지 다양한 붓 터치 기능을 사용할 수 있지만 딱딱하고 미끈한 액정 느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효율성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종이의 질감, 붓의 유연함, 오래돼서 꾸덕한 먹물을 찍어 그려내는 그 느낌을 버릴 순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관악문화재단의 제안으로 우수창작 문화콘텐츠 지원을 받아 강감찬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 웹툰 '별을 품은 아이'를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했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으로 독자들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5부 연재 중 가정사로 잠시 휴재했던 고일권 작가가 돌아온다. 최근 네이버웹툰에 원고를 넘기고 복귀를 앞둔 고 작가를 노컷뉴스 [만화인]이 만났다.
'웰메이드 사극 웹툰' 작가 태블릿 대신 필묵을 들다
- 잠시 휴재했던 '칼부림' 연재를 위해 곧 복귀한다고 들었다.
= 작년에 셋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몸이 안 좋아서 바로 입원을 했다. 당초 12월 복귀할 예정이었는데 이런저런 집안일이 있다 보니 연재가 쉽지 않아 휴재기간이 늘었다. 누가 케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런 저런 문제를 극복해야 하다 보니 복귀가 늦어졌다. 연재도 잠시 멈추다 보니 다시 손에 잡는 것이 쉽지 않더라. 현재 네이버웹툰에 원고를 넘긴 상태다. 빠르면 2월 중 나머지 5부를 이어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 '칼부림'은 드문 정통 역사 만화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의 판타지, 회귀물과 같은 웹툰 인기 장르와는 달라 호불호가 뚜렷하다는 평가도 있다. 정통 역사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 원래 역사물을 좋아했는데, 군 복무때 김훈 작가의 역사소설 '칼의 노래'를 봤다. 관련 연구서인 한명기 교수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라는 연구서를 접하면서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전쟁의 배경, 전란 이후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군 제대 후 역사 만화를 해보자는 기획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한국의 다양한 역사와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니 선조와 광해, 인조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에 있던 조선의 일대 사건인 '이괄의 난'에도 항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2012년부터 이를 토대로 작품 기획을 하면서 불패의 이순신이 죽자 전란도 끝난다는 모티브에서 이괄의 난을 중심으로 역사와 전쟁사를 풀어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주제가 무겁다 보니 정통 역사 장르가 웹툰에서는 드물다. 정통 대하 사극(드라마)도 아무래도 연령층이 높지 않나. 순전히 제대로 고증된 역사 웹툰을 그려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 '칼부림' 연재가 벌써 10년이다. 이괄의 난을 전후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5부작을 끝으로 마무리할 예정인가?
= '칼부림'은 2013년 12월 연재를 시작했는데,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한 5부작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원래 이괄의 난에서 끝나야 했던 작품인데, 결국 더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연재를 늘어지게 만들었다. 이전까지 연재해온 내용들을 보면서 아무래도 부족했던 부분들이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인조반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후 이괄의 난을 다루다 보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세트로 묶이게 됐다. 작화나 역사 고증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주신 부분도 있지만 스토리 전개 측면에서 아쉬움을 4부와 마지막 5부에서 잘 마무리하고 싶다.
- 정통 역사 만화라는 특징도 있지만 철저한 고증으로 화제를 모았다.
= 우리가 방송이나 영화 사극을 보면서 고증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지 않나.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각종 연구서나 역사 사료를 접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물론 스크린으로 역사 고증을 재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연출자의 역사 이해도 중요하고 제작 비용이나 고증을 반영하는 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반면, 웹툰은 그런 측면에서 시대적 몰입감을 충분히 줄 수 있는 저비용 고효율의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다양한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자문도 구하면서 진법이나 병기, 의복, 용어 등에서 최대한 사실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 그림체가 일반 웹툰과는 많이 다르다. 보통의 작가들처럼 디지털 패드 등을 이용하지 않고 종이에 붓과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화만 해도 수만 장이 될 것 같은데?
= 수만 장까지는 아니고 수천 장 정도 되는 것 같다. 한 장면을 여러 번 다시 그리지 않고 보통 한 번에 끝낸다. 성격인 것 같은데, 조금 틀려도 적당히 마무리한다. 과거 흑백 만화의 시절에는 선으로, 지금의 컬러 만화 시대에는 면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 한다. 아무래도 붓으로 그리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한다. 펜선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정통 역사 장르다 보니 필묵을 사용하는 것이 그 분위기를 더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
태블릿을 이용해도 다양한 종류의 붓 선 터치 기능이 가능하다. 그런데 손맛의 차이가 있다. 결과물로서는 실제 붓을 사용하나 태블릿 붓 기능을 사용하나 거의 비슷하다. 딱딱한 펜과 미끈한 액정의 터치감이 안 맞더라. 꾸덕한 먹물에 유연한 붓을 찍어 서걱거리는 종이에 그리는 질감이 좋았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좋으냐의 문제는 아니다. 순전히 취향이다. 게다가 10년을 붓으로 그리다 보니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있다.
- 고 작가의 웹툰을 보고 황석영의 '장길산'을 만화로 그린 백성민 화백의 그림체가 생각났다.
= 붓으로 만화를 그리는 몇 남지 않은 대표적인 화백이시다. 사실 2012년 한창 '칼부림'을 기획하던 중 한 만화 행사에 참석하신 백성민 화백의 사인회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백 화백님의 그림체를 워낙 좋아했고 지금 봐도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캐릭터 시트를 보여드리고 작품 기획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더니 "잘 해보라"며 응원해주셨다. 10년 전 짧은 만남이었지만 다시 기회가 된다면 정식으로 만나뵙고 싶다.
옛 전성기의 만화가들이 역사 만화를 그릴 때 주로 붓으로 그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그것을 계승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역사 장르에 붓이 주는 필력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뷔 전에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입시미술이다 보니 여러 붓을 자주 사용해 익숙하기도 했다. '칼부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때 비싸다고 하는 일제 붓펜을 써보기도 하고 수채화 붓을 사용해보기도 했는데 전통 서예 붓이 잘 맞더라. 줄곧 서예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 최근 대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화제인데, 카카오페이지에 강감찬의 일대기를 그린 고 작가의웹툰 '별을 품은 아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 강감찬의 고향이 관악구 낙성대 근처다. 2022년 관악문화재단에서 우수창작 문화콘텐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강감찬의 일대기를 그려달라는 제안이 왔다. 강감찬에 대해서는 귀주대첩만 알았는데, 여러 기록을 찾다 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워낙 기록이 없어서 역사적 고증이 쉽지는 않았다. 실제 어떤 갑옷을 입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림으로 고증하기가 까다로웠다. 당시 시대 자료를 찾아보면서 문관이자 장수였던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작년에 시즌 2까지 나왔다.
- 역사 고증을 철저히 하는 작가답게 역사 드라마나 영화에도 관심을 많을 텐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역사 고증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사실 원작자나 방송작가, 연출자 각자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평가한다는 게 조심스럽다. 제 개인 SNS를 통해 몇 차례 생각을 올린 적이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 사극이 '태조 왕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삼국지 같은 느낌에, 무장은 너무 무장 같고, 간신은 너무 간신 같고, 너무 열화돼서 캐릭터를 너무 단순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에 이입해서 표현하기보다 오늘 시대의 생각에서 캐릭터를 그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나온 전쟁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면서 그런 구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극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는데, 회차가 후반부로 가면서는 전쟁 신에 한정됐던 생각인 것 같다.
기록이 거의 없고 작가적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역사적 맥락은 갖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역사 마니아가 아닌 일반 시청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정통 사극에 대한 고증 문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나오지 않았나. 많이 개선됐지만 극적 상황을 만들기 위해 너무 인위적인 장면들을 넣다 보면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다. 역사적 상상이 포함된 드라마라는 특성상 다큐멘터리처럼 만들 순 없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역사적,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있는 역사극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처럼 나온 전쟁 사극인데, 시청자 입장에서 잘 수습해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 현대물과 달리 역사물을 다루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어려운 점이 있나?
= 부족한 시간이 가장 문제다.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매주 이어가는 하나의 큰 그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역사의 큰 흐름에 맞춰가되 작품이 다루려는 세계관 안에서의 법칙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정해진 결말까지 밀고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제 독자들은 역사 고증에 대한 칭찬이나 언급은 많이 하는데 만화적 재미에 대해서는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만화적 재미는 없는데 고증은 잘 됐네'라고 할까.
작품 후반부이긴 하지만 그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이젠 스토리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최근에는 독자분들이 캐릭터에 대한 서사, 대사 하나 하나에 감정이입을 해주기 시작해 뿌듯하다. 온전히 이 만화를 즐겨주시는구나, 내가 좀 더 노력하고 독자분들의 마음을 끌어오는 스토리를 잘 만들면 공감이라는 보상을 받는구나 하고 느끼게 됐다.
- 만화·웹툰 시장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 바라보나?
= 코로나19 때 붐이 일었다가 엔데믹 이후 주춤하는 모양새다. 네이버웹툰을 기준으로 요일별 60~70개의 작품들이 연재되고 있다. 전체 주간 400여 개의 작품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일부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노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결국 장르 편중, 작품 양극화 문제로 불거지는 것 같다. 스튜디오 작품들은 독자들의 니즈에 충실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지만 개인 창작자들은 딱히 자신의 작품을 노출시킬 방법이 없다. 찾아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데, 작품이 재미있고 재미없고를 떠나 순위 노출 방식에 한정하지 않고 유저 개개인의 취향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작품들이 노출될 수 있었으면 한다. 토양이 기름지고 다양한 식물을 품을 수 있어야 수확의 결과도 좋지 않나.
생성형 AI도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저는 AI가 가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이미 제 작화 스타일이 익숙해서 갑자기 디지털 작업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AI가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하는 시대라고 본다. 사극은 시대 고증이나 다양한 역사 연구, 유물 등을 토대로 맥락을 만들고 이를 표현해야 하는데 AI가 그 결과물을 충분히 아직 뽑아내지 못한다.
시장의 변화나 정책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힘을 가져야 하는데 창작자 개개인으로 있다 보니 서로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작가에 대한 대우는 좀 나아졌다고 하는데, 작가 삶은 여전히 주간 마감에 쫓겨다닌다. 휴재가 작가들 입장에서는 가장 큰 문제인데, 수입과 연결되어 있으니 쉽지 않다. 작가들을 보면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가 많이 생긴다. 프리랜서라지만 다른 분야 창작자들과 달리 플랫폼에 속해 주간 마감에 쫓기는 문제가 크다. 최소 1년을 연재하면 법정휴가처럼 유급 휴가를 일정기간 제공하는 등 플랫폼이나 제도권에서 산업적 성장만이 아닌 창작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창작 여건을 개선하는 정책도 함께 마련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칼부림' 5부가 마지막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차기작 계획도 세웠나?
= 현재 병자호란으로 넘어가는 '칼부림' 5부를 잘 마무리하는 게 우선 가장 중요하다. 5부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차기작은 개념만 잡아 놓은 상태인데 고려 이전의 시대 중에서 하나가 될 것 같다. 물론 정통 역사 장르 뿐만 아니라 파생 장르도 해보고 싶다. 여러 작가들과 다양한 방식의 협업도 고민해보고 있다. 좋은 이야기꾼이자 그림쟁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