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지난 15일 원작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구 '고려거란전기') 길승수 작가가 원작과 드라마의 다른 사건들과 인물 묘사를 밝힌 데 있다. 양규 장군의 전사 이후 현종의 낙마 등 전개에 시청자들이 고증에 아쉬움을 드러내자 길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원작 소설에는 이 같은 장면이 없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KBS와 원작 계약은 차기작 '고려거란전쟁: 구주대첩'까지 했다. 이 원고는 400페이지 정도 KBS에 제공됐다. 양규 사망 후 전후 복구 부분을 담은 내용"이라고 전했다. 이후 자신의 댓글을 모아 기사가 나가자 "드라마가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소신"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22일에도 극 중 현종과 호족이 대립하는 전개, 역사 고증과 맞지 않게 등장한 일부 캐릭터들에 쓴 소리를 남겼다. 드라마 속 역사왜곡을 지적하는 시청자들과도 활발하게 의견을 나눴다.
논란이 확산되자 '고려 거란 전쟁' 측은 23일 드라마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고려 거란 전쟁' 연출을 맡은 전우성 PD는 11세기 초 고려와 거란의 전쟁 시기에 주목했고, 고려 황제 현종과 귀주대첩 영웅 강감찬을 중심으로 거란과의 전쟁 10년간 이야기를 극화하기로 기획을 시작했다.
작품 개발에 착수하면서 자료를 검색했고, 전 PD는 그 과정에서 길 작가의 소설 '고려거란전기'를 검토했다. 2022년 상반기 판권 획득, 자문 계약을 맺고 전 PD는 제작 과정에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전쟁·전투 장면의 디테일을 '고려거란전기'에서 참조했다.
그러나 그 해 하반기 이정우 작가가 '고려 거란 전쟁'에 합류해 대본 집필에 돌입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 작가는 '고려거란전기'를 검토한 후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고 전 PD 역시 그 의견에 공감했다. 그래서 1회부터 지금까지 원작 소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전 PD는 드라마 자문 경험이 풍부한 조경란 박사를 중심으로 자문팀을 새로이 꾸렸고 이 작가는 해당 의견을 수렴해 대본을 집필 중이다.
'고려 거란 전쟁' 측은 "역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들이 조선시대보다 현저히 적은 고려 시대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요 사건들의 틈새를 이어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특히 드라마의 경우 고유한 영역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창작물이기에 제작진은 역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보다 상황을 극대화하고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고려 거란 전쟁'만의 스토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시청자들을 설득했다.
이에 길 작가도 원정왕후 캐릭터의 쓰임새를 들어 제작진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같은 날 블로그에 "KBS에서 해명 보도를 냈는데 웃기지도 않는다. 2022년 6월경 처음 참여했을 때 확실히 제 소설과 다른 방향성이 있었다. 그 방향성은 '천추태후가 메인 빌런이 되어서 현종과 대립하며 거란의 침공도 불러들이는 스토리'였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제가 화들짝 놀라서, 전작 KBS 드라마 '천추태후'도 있는데, 그런 역사왜곡의 방향으로 가면 '조선구마사' 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포기됐는데, 결국 그 이야기가 원정왕후를 통해서 어느 정도 살아남았더라"고 지적했다.
제작진은 재차 해명과 반박을 이어갔다.
전 PD는 입장문을 통해 "'고려 거란 전쟁' 원작 계약의 경우는 리메이크나 일부분 각색하는 형태의 계약이 아니었다. '고려거란전기'는 이야기의 서사보다는 당시 전투 상황의 디테일이 풍성하게 담긴 작품"이라며 "꼭 필요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보고자 길 작가와 원작 및 자문 계약을 맺었고 극 중 일부 전투 장면에 잘 활용했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자문이 불발된 이유에 대해서는 "하지만 길 작가는 이 작가의 대본 집필이 시작되는 시점에 소설과 '스토리텔링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증과 관련된 자문을 거절했다. 수 차례 응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고사했다"면서 "그럼에도 길 작가가 저와 제작진이 자신의 자문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고증도 없이 제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다"라고 밝혔다.
이 작가 역시 "'고려 거란 전쟁'은 소설 '고려거란전기'를 영상화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KBS의 자체 기획으로 탄생했으며 처음부터 제목도 '고려 거란 전쟁'이었다"라면서 "원작 계약에 따라 원작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 소설은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태동 시키지도 않았고 근간을 이루지도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다.
원작과 다른 방향성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이 드라마의 작가가 된 후, 원작 소설을 검토했으나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때부터 고려사를 기반으로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설계했다. 제가 대본에서 구현한 모든 장면은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창작된 장면들"이라며 "시작부터 다른 길을 갔고 어느 장면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다. 처음부터 별개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사실 원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라고 설명했다.
길 작가의 지적에 관해서도 "원작 소설가가 '16회까지는 원작의 테두리에 있었으나 17회부터 그것을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의도를 모르겠다. 원작 소설가가 저에 대한 자질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분명 도를 넘은 행동"이라며 "이 드라마를 어떻게 구성하고 이끌어가는지는 드라마 작가의 몫이다. 저는 제 드라마로 평가받고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로 평가받으면 되는 일"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자 길 작가는 "자문을 거절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팽팽히 맞섰다.
그는 24일 블로그에 글을 올려 "제가 자문을 거절했다니 이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면서 이 작가와의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이 작가로 교체된 후 참석한 회의에서 길 작가는 이 작가로부터 문서 작업을 지시받았다. 이는 보조작가의 업무이지 자문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 길 작가는 이를 거절, "내가 통합해서 작성한 고려사가 있으니, 보조작가에게 시키면 된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 전 PD가 길 작가를 찾아와 이 작가 말대로 문서 작업할 것을 요구했다. 다시 계약 내용을 짚자 전 PD는 이를 수긍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올 필요가 없다'고 먼저 자문을 거절했다. 길 작가는 자문을 계속하겠다고 했지만 전 PD는 다른 자문을 구하겠다고 결정을 굳혔고, 결국 길 작가는 다른 전문가를 추천하면서 '꼭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 작가는 "제가 자문을 거절한 것이냐. 지금이라도 사태를 거짓으로 덮으려고 하지 말고, '대하 사극'인데 역사적 맥락을 살리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앞으로 최대한 노력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KBS에서 오랜만에 내놓은 대하 사극 '고려 거란 전쟁'은 초반부터 화려한 전투와 탄탄한 스토리, 믿고 보는 연기로 시청률 10%를 돌파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넷플릭스 서비스로 2030 젊은 시청자들까지 '고려 거란 전쟁'에 열광했다. 그러나 중반을 넘은 시점에 '악재'가 겹치면서 지금껏 쌓은 성과까지 빛이 바랠 위기에 놓였다. 역사 고증·극 전개 문제와 관련된 시청자들 불만이 쌓이다 터져 결국 원작자와의 갈등까지 깊어지고 있다. 과연 '고려 거란 전쟁'이 이를 잘 봉합하고 전화위복 삼을 수 있을 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