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우리가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최고의 방법이자 첫 걸음이 돼야 할 것은 어쩌면, 범죄의 문제는 피해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며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일 터이다. 영화 '시민덕희'는 관객들을 이러한 마음으로 이끌며, 피해자 덕희와의 연대로 향하는 길잡이가 된다.
세탁소 화재로 인해 대출상품을 알아보던 생활력 만렙 덕희(라미란)에게 어느 날 거래 은행의 손 대리(공명)가 합리적인 대출상품을 제안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온다. 대출에 필요하다며 이런저런 수수료를 요구한 손 대리에게 돈을 보낸 덕희는 이 모든 과정이 보이스피싱이었음을 뒤늦게 인지하고 충격에 빠진다.
전 재산을 잃고 아이들과 거리로 나앉게 생긴 덕희에게 어느 날 손 대리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황당하게도 이번엔 살려달라는 전화다. 경찰도 포기한 사건, 덕희는 손 대리도 구출하고 잃어버린 돈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필살기 하나씩 장착한 직장 동료들과 함께 중국 칭다오로 직접 날아간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이 영화가 실화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영화는 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덕희가 어떻게 피해자가 되는지 그 과정을 흔들림 가득한 카메라로 쫓으며 현실감을 더한다. 그렇게 현실성을 더한 '시민덕희'는 이후 가해자인 보이스피싱 총책을 찾아 떠나는 추적 활극으로 변모한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총책 찾아 나서기'란 추적극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피해자의 용기, 피해자와의 연대를 거쳐 '피해자'를 편견으로부터 끌어 올린다. 즉, 범죄 사건에서 흔히 하는 잘못인 '피해자 탓'에 갇혀 자책하는 덕희에게 이 모든 사건의 잘못은 덕희가 아닌 총책에게 있음을 명확히 한다.
먼저, 피해자인 덕희는 피해자임에도 수사기관으로 대표되는 박 형사(박병은)에게 왜 보이스피싱에 넘어갔냐는 타박을 듣는다. 이는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발언이자 사회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시선이다.
이런 시선 아래 덕희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피해자임에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잘못처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 속에 애먼 속만 타들어갈 뿐이다. 결국 그런 덕희는 자신에게 사기 친 보이스피싱 범죄자로부터 구조 신호를 받은 후 결국 스스로 보이스피싱 총책을 찾아 나선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너무 가볍게 다가가지 않으려 하면서도 관객들이 실화 소재가 갖는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중간중간 적절하게 유머 코드를 넣어 영화가 가고자 하는 길로 안내한다. 덕분에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관객들이 덕희의 추적극을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캐릭터의 힘도 한몫한다. 덕희와 재민의 보이지 않는 케미와 덕희와 봉림(염혜란)의 케미는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덕희를 중심으로 덕희와 함께 총책 추적에 나선 봉림, 숙자(장윤주), 애림(안은진)의 코믹 케미를 바탕으로 재림은 극에 긴박함을 불어 넣는다. 여기에 요즘 '이무생로랑'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무생이 연기한 총책은 중간중간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결과만 두고 봤을 때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사람을 함부로 어리석었다 할지 몰라도 그 상황에 놓이지 않은 우리로서는 그 과정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다. 또한 보이스피싱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범죄로 인해 벌어진 점이라는 데서 가해자가 원인이며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이 중요하다.
덕희는 추적과 총책 검거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겪으며 보이스피싱은 피해자 아닌 가해자의 탓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덕희는 마지막까지 총책 측의 제안에 타협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피해자를 향한 편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난 덕희의 모습과 함께 피해자들의 연대가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마지막 덕희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담긴 것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바일 것이다.
단편 '1킬로그램'과 중편 '선희와 슬기' 등을 통해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 온 박영주 감독은 첫 상업 장편 '시민덕희'를 깔끔하게 완성해 내며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금 증명했다. 박 감독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다음에는 또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할 수밖에 없다.
113분 상영, 1월 24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