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재건축 규제를 아주 확 풀어버리겠다" 최근 재건축 규제 완화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의 일성이다. 이른바 '1.10 대책', 준공 후 30년 된 아파트의 재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추락'하는 주택 시장을 부양하겠다고 나섰지만, 시민들이나 시장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정부의 대책이 먹히지 않는 이유, 왜일까?
무주택자들 "내 집 마련 더 어려워질 것"
지난 10일 정부는 대통령 주재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 토론회'를 열어 '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했다. 준공 후 30년이 지난 아파트는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 절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재건축 과정은 통상 9개 단계로 나뉘고, 그 중 첫 단추가 바로 안전진단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않아도 정비계획 수립부터 추진위원회 구성, 조합 설립 등 6단계까지 재건축 절차부터 일단 진행하고, 안전진단은 사업인가 전까지만 통과하면 된다.
정부는 계획대로라면 재건축 사업 기간이 최대 5~6년 가량 단축돼 재건축 시장이 활기를 띨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순히 준공 후 30년 이상 된 아파트만 따져보면, 관련 법 개정까지 마쳐 정책 변화가 실현될 경우 서울 시내 아파트 중 약 30% 가량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기대된다.
"빈익빈 부익부만 심해지는 것 아니냐" 하지만 가장 먼저 불만이 터지는 곳은 재건축할 집은커녕 제 몸 하나 뉘일 곳 찾기 어려운 청년 세대다. 시민 이현(23)씨는 "아무래도 이번 정책이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 더 이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 가혹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주택 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더 올랐다며 이번 대책으로 공급이 확대되면 집값이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 심리·투기 심리만 부추기면 오히려 집값이 올라 '내 집 마련'만 한걸음 더 멀어질 것이라는 무주택자들의 반박이 매섭다.
서울 광화문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는 김동욱(26)씨는 "재건축 규제가 완화되면 집값이 올라 나 같은 청년들이 갈 곳이 더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면서 "집값이 오를까 걱정이 된다"고 지적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강모(26)씨 또한 "서울에 집을 마련하려는 나 같은 입장의 사람에게는 너무 빡빡한 상황"이라면서 "정부는 이런 상황에 갇혀있는 청년들을 고려해 규제 완화를 철회해 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택수 부동산국책팀 부장도 "이번 대책은 모든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소수의 부동산 부자와 토건업자들을 위한 대책"이라면서 "개발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개발 이익은 결국 집값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무주택 서민들과 유주택자 간의 자산 격차는 훨씬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장 반응도 시큰둥 "총선용 정책 아닌가"
정부와 무주택자, 누구의 말이 맞을까. 그런데 정부의 '통 큰' 규제 완화에도 정작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총선 때문에 벌이는 대책이라 의미가 없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가람아파트 인근에서 부동산을 하는 공인중개사 A씨는 "지금 시장이 안 좋아 건설업자들이 못 들어온다. 재건축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울 노원구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B씨도 "안전진단을 완화해 준다고 한들, 전반적인 분위기를 봤을 때 재건축 시기가 크게 많이 당겨질 것 같지도 않다"고 전망했다.
재건축 아파트는 실거주보다 투자재 성격이 강해서 수요가 크게 위축된 집값 하락기에는 규제를 완화해도 당장 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반감된다. 실제로 이번 1.10 대책 발표 이후에도, 대표적인 수혜 대상으로 꼽힌 재건축 단지들조차 가격 변동이 크지 않다. 지난 19일 부동산R114에 따르면 지난 주 서울 아파트값은 보합(0.00%)을 기록하며 재건축과 일반 아파트 모두 가격 변동이 없었다.
애초 재건축을 비롯해 정비사업은 '사업성'이 관건이다. 사업성만 충분하다면, 절차가 아무리 빡빡해도 사업을 추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재건축 연한을 채운 서울 시내 주요 아파트 단지들은 이미 용적률이 200% 내외라 더 크게 늘리기도 어렵다. 건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공사비도 폭등했고, 금리까지 치솟은 상황에서 재건축에 착수할 수는 있어도 서둘러 사업을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건설업계의 분석이다.
애써 재건축 사업에 돌입해도 큰 이득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니, 심지어 이번 재건축 규제 완화 대책의 수혜를 보게 되는 노후 아파트 입주민들조차 마냥 환영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칠 현실적인 어려움부터 먼저 토로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가람아파트 입주민 김모씨는 "이곳에 직장 때문에, 혹은 학군이 좋아서 오는 사람들도 많다"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재건축하는) 동안에 어디로 가서 살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4단지아파트 주민 C씨는 "사는 사람들이 일단 나가야 하는데, 솔직히 부담스럽다"면서 "(이사하는) 비용은 다 어디서 나오냐, 입주 들어갈 때 돈을 또 부담해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안전도, 환경도 걱정 "잘 만들어서 오래 쓰는 게 맞지 않냐"
재건축은 단순히 집값이 오르고 내리는 문제만이 아니다. 수백, 수천여 명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한번에 허물고 다시 짓는 일은 여러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새롭게 낳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재건축 규제 완화로 인해 노후 아파트의 안전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고 짚는다. '30년'이라는 연수만 채우면 재건축이 가능하다면, 붕괴 위험이 큰 노후 아파트라도 어떻게든 '30년'을 버티려 하는 등 안전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강원대 정준호 부동산학과 교수는 "'수선을 안 해도 30년만 떼우면 된다', '집을 대충 써도 된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어 안전에 문제가 있는 아파트들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의도대로 대규모 재건축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이 과정에서 발생할 건설폐기물에 따르는 환경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에 따르면 1기 신도시 약 30만 가구를 모두 철거할 경우 발생하는 건설폐기물은 무려 56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1기 신도시 외 택지까지 재건축을 진행할 경우 폐기물 규모는 훨씬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 교수는 "가급적이면 아파트를 처음부터 잘 시공해서 100년 가까이 쓰게끔 해야 하는데, (30년도 안돼서) 철거를 해버리면 다 쓰레기가 되지 않냐"고 말했다.
더구나 내년부터 수도권 매립지에 건설 폐기물 반입이 중단되는 만큼, 재건축에 따른 대규모 건설 폐기물을 처리할 곳을 찾기가 어려워 '폐기물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1.10 대책을 놓고 국회에서 관련 법(도시정비법) 개정을 앞두고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기대학교 김진유 도시교통학과 교수는 "재개발 재건축 규제 완화를 해주면서, 동시에 무주택자나 서민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실련 정택수 부장은 "우리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거라면, 이런 재건축 완화 대책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면서 "그보다는 공공택지를 활용한 장기공공주택들을 대거 공급하는 게 훨씬 더 적합한 대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