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승현이 처음부터 고려 역사에 통달해, 양규 장군을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캐릭터를 준비하며 사료를 찾아보니 양규 장군은 역사에 남을 훌륭한 무장 그 자체였다. 거란군과 수적 열세 속에서도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3만 고려 포로를 구하기 위해 끝내 위험한 전투에 뛰어들어 마지막을 맞는다. 그래서 지승현도 '무조건 양규 장군을 알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지승현의 진심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이 같은 인기는 불가능했다. 지승현은 다소 지루하거나 처질 수 있는 사극의 초반을 양규 장군이란 캐릭터로 확실히 각인 시켰다. 최대한 고증을 거친 무거운 갑옷과 수십번 액션합을 맞추면서 양규 장군을 구현해 나갔다. '고려거란전쟁'이란 드라마 제목에 맞게 강감찬 장군(최수종 분)의 활약만 집중 조명하지 않고, 양규 장군 등 굵직한 장수들의 활약상을 다룬 제작진의 선택도 옳았다.
뿐만 아니다. 지승현은 지난해 대표 사극 인기작들에 잇따라 참여하면서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다. MBC 금토드라마 '연인'에서는 청나라 포로로 잡혀간 길채(안은진 분)를 찾으러 심양까지 갔다 돌아가 버리는 남편 구원무 역을 맡았다. 얄미운 태도로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지만 지승현은 그마저 기뻤다. 드라마가 열심히 사랑 받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지승현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A 양규 캐릭터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 이제는 양규 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된 것 같아서 좀 뿌듯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저도 그분을 몰랐기에 부끄러웠고, 스태프들에게 이 드라마를 잘해서 내가 시청자들에게 양규 장군을 다 알릴 거라고 그런 말을 정말 밥 먹듯이 하고 다녔다. 진짜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웃음)
Q 양규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촬영한 날이 또 생일이었다고. 감회가 남달랐겠다
A 그날 양규 장군님이 세상을 떠나는 신을 찍으려고 뿌리는 인공 눈을 준비했다. 그런데 정말 눈이 왔다. 감독님도 '양규 장군님이 돌아가시고 지승현이 다시 태어난 날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화살이 꽂힌 채로 '컷' 하자마자 생일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김혁 분)를 죽이기에 거리가 부족하자 공격을 당하면서도 입으로 활을 쏘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걸어가는 장면,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걸 감독님이 한 테이크로 찍으셨다. 감정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뜻 깊은 죽음이었다.
A 공교롭게도 두 작품이 모두 대상을 배출한 드라마더라. 제가 참여하게 되어서 일단 영광이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4분기에 사극이 연속이라 고민을 많이 하긴 했다. 내가 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좀 있었다. '연인'의 구원무는 길채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서사라고 봤고, 양규 장군님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니까 전쟁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Q 구원무라는 캐릭터는 양규 장군과 다르게 시청자들의 질타와 미움도 많이 받았다
A 시대적으로 조선과 고려가 굉장히 다르다. 고려는 남녀평등 사회였고, 유산 분배도 남녀가 같이 받았었고, 오히려 모계 쪽이 더 힘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조선은 사실 원무 자체다.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사회이니 이에 대한 반감이 지금 세대들에게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구원무는 '나쁜 놈'이지만 저는 연기를 하기 위해 그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원무가 애초에 길채를 찾으러 심양까지 갔다는 자체가 이미 그 시대를 뛰어넘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렇게 남편이나 애인이 찾으러 오는 경우는 없다'는 대사도 나오지 않나. 여성들의 시각에서는 원무가 찌질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캐릭터를 사랑했고, 그만큼 드라마가 잘 되고 관심이 있다는 증거니까 좋았다.
A 대본에 처음 등장할 때는 잘 몰랐다. 그냥 장수라고만 알았다. 그런데 실존 인물임이 분명하니까 사료를 검색하고, 감독님도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업적이 정말 화려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하더라. 거란군 40만이 공격하는데 흥화진 전투에서 3천 명으로 7일을 지켜냈다는 것도, 전쟁 학자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더라고요. 6천 명 거란군이 곽주성에 있는데 약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탈환한 것도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란 표현이 있다. 마지막에 돌아가는 적을 끝까지 물어 뜯으면서 3만 명의 포로를 구한 것까지, 자기 희생 정신을 포함해 굉장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Q 왜 시청자들은 고려의 숨겨진 영웅이자, 뜨겁게 고려를 사랑했던 양규 장군에 열광하는 걸까
A 그게 사극의 순기능이 아닌가 싶다. 숨겨진 영웅들을 이렇게 끌어내서 보여주면서 잘 알게 되고, 미국 같은 경우에는 영웅들을 굉장히 많이 내세우지 않나. 우리나라는 그런 게 조금 부족한데 그래도 이순신 장군님이 힘을 주시고, 우리가 그걸 받는 것처럼 양규 장군님도 새로운 알려짐이라 그런 것 같다. 영웅적인 것들을 꺼내서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부분도 있지만 연출적으로 전쟁신들이 너무 멋있고 리얼하게 나오니까 양규라는 캐릭터 자체를 역사와는 별개로 좋아하는 것도 있지 않나 싶다.
A 확실히 플랫폼의 변형이 크다. 넷플릭스에 방영이 되다 보니 한 번 보자는 그런 분위기도 있는 거 같다. 화려한 전쟁 장면들이 짧게 숏폼으로 만들어져서 보여지니까 좀 더 드라마로 유입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선배님들에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전에는 KBS와 MBC의 대하 사극 톤이 달랐다고 하더라. KBS는 정통, MBC는 그나마 스타일리시하게 연기를 해도 됐었다고 한다. 또 김동준 같은 젊은 배우들이 왕 역할을 하면서 사극적인 느낌보다 너무 시청자들이 과하다고 느끼지 않게 톤이 표현된 것 같다.
Q 40대가 됐고 영화 '바람'으로 데뷔한 지 18년 만에 연말 시상식에서 인기상과 남자 우수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의 배우 생활을 돌아보자면
A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힘들었던 시간엔 괴로웠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작년 12월부터 제가 처음으로 흰머리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배님들도 그렇겠지만 마음은 20대인데 그게 그렇더라. (웃음) 이제 어른이니 내 농담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구나 그런 걸 느낄 때도 있다. 아마 '바람'이라는 영화가 한 번에 잘돼서 다운로드 천만회가 아니라 진짜 천만 관객이었으면 제가 어린 나이에 허파에 바람도 들어갔을 거 같다. 지난 시간들이 우여곡절도 있고 힘들기도 했지만 조금씩 더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Q 이제 남은 '고려거란전쟁'은 어떤 전개를 기대하면 좋을까. 관전 포인트가 궁금하다
A 일단 제가 정말 시청자가 되기 위해서 17부 이후의 대본을 보지 않았다. 사실 스포일러는 역사로 다 나와 있지 않나. 후반에는 이제 내전도 있을 것이고, 현종(김동준 분)이 좀 더 현명하게 성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는 일들, 그리고 감독님 말에 따르면 정말 탈아시아급으로 나오게 될 강감찬 최수종 선배의 귀주대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저도 기대하면서 같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