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우리 정부가 시작한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제3자 변제 '해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위기에 처하는 모양새다. "컵에 물이 반은 찼다(박진 외교부 장관)"는 말과 달리 일본 정부나 기업이 참여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민간의 자발적 기여'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참여를 끌어낼 실질적인 방법이 처음부터 마땅찮았던 점을 보면 이는 사실상 예정된 일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은 지난 11일과 지난해 12월 28일, 12월 21일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히타치조센 등을 상대로 낸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잇따라 확정했다. 이는 2018년 10월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 등 15명의 원고가 최종 승소했던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과 같은 맥락이다.
제3자 변제 '해법', 모든 승소 원고들에게 적용하지만…추가 재원 마련 어려워
외교부는 지난해 3월 '해법' 발표 이후로 모든 승소 원고들에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민법 469조에 따라 말 그대로 '제3자'인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변제를 하겠다는 뜻이다.2018년 10월 판결의 원고 가운데 수용 의사를 밝힌 원고는 15명 가운데 11명(피해자 본인 또는 유족)이며, 이들에게 지급된 금액은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합해 모두 25억원 정도다. 지난해 연말에서 올 초까지 승소한 원고들이 어떤 방법을 택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 중 한 명인 이모씨가 히타치조센이 서울고등법원에 공탁한 돈 6천만원을 받기 위해 최근 압류·추심명령신청서를 낸 사례는 있다.
문제는 '재원'이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실이 재단으로부터 확인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재단에 접수된 기부 건수는 12건으로 공개된 금액은 41억 6345만원이다. 재일교포 2세 가네홀딩스 회장이 개인 명의로 5천만원을 기부한 것을 제외하면 일본 기업의 참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피고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들은 이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이미 해결됐다며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기부금이 추가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변제'에 필요한 돈 자체가 바닥날 가능성이 크다.
기부 이외에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가해 기업의 우리나라 내 자산에 대한 강제 현금화(매각) 조치뿐인데, 일본은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일종의 '레드라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잖아도 원고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 등은 정부 '해법'과 그에 따른 법원 공탁을 모두 거부하며 강제 현금화 명령을 청구해 현재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때문에 이 문제는 차후 한일관계의 새로운 '뇌관'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고비가 이미 예고돼 있는 셈이다.
'문희상안' 무산 거울삼아 대국민 설득 필요했지만…'한미일 안보협력'에 떠밀려, 예고된 한계
사실 정부 '해법'의 골자는 지난 2019년 제안됐던 '문희상안'과 거의 비슷하다. 문제는 '해법' 추진 과정에서 당시의 교훈이 그다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제안한 '1+1+α' 안은 한일 양국의 기업과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기금에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로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 기금 가운데 남은 60억원을 합쳐 지금처럼 제3자 변제를 하는 안이었다.
주목할 점은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배상금'은 아닐지언정, 실제로 10억엔을 화해치유재단에 냈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실제 변제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셈이다.
정부가 아닌 국회의장 명의로 추진된다는 점에서 양국의 정치적 부담도 덜했고, 실제로 일본 측에서도 일정 부분 호응이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 측과 여론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문제는 정부의 '해법'이 '문희상안'과 비교해도 훨씬 후퇴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60억원이라는 재원도 없을 뿐더러, 일본 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도 없었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한일관계 회복 기조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한미일 안보협력이고, 이는 미국이 북한 뿐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지속적·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항이다. 그렇기에 역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 자체가 부족하다.
민간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피해자와 시민단체, 그리고 국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과 설득이 있어야 했지만 부족했다. 60억원이라는 재원이 이미 있었던 '문희상안' 조차도 여론의 반발에 밀려 무산됐는데, 그마저 없는 상황에서 떠밀리듯 '해법'을 추진했다가 위기를 불러온 셈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12일 취임 뒤 첫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에 "강제징용 판결의 외교적 측면에서 문제의 핵심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제와 2018년 우리 대법원 판결 사이의 불일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해소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3자 변제 '해법'이라는 것이 이러한 현실 속에서 거의 유일한 방안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한일관계 개선의 흐름을 타서 일본 민간 기업들도 함께 배를 타는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노력에 동참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강구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기업들의 참여는 요원한 형국이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조성렬 초빙교수(전 주오사카 총영사)는 "윤석열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한 대법원 판결이 갖는 의의를 폄훼하고 일본의 선의에 기대하는 안이한 외교적 자세를 보였다"면서 "대법원 판결이 당장 한일관계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해결할 일이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중단할 일은 결코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에 대해선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우리 측의 요구는 일본이 식민지배 책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이미 최악을 달렸던 한일관계를 둘러싼 과거사 현안은 모두 해결되고 관계가 좋아질 일만 남은 셈이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