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을 넘어 '폴리코노미(Policonomy)'의 시대다. 폴리코노미란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경제를 의미하는 '이코노미(Economy)'의 합성어로, '정치가 경제를 휘두르는 현상'을 의미한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각종 공약을 쏟아내면서 이로 인해 한 국가의 경제 정책이 뒤흔들리는 상황을 빗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가깝게는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한 갖가지 경제 정책들이 금융당국이 아닌 정치권으로부터 쏟아지는 모양새다. 선거를 앞두고 대중을 의식한 공약을 내는 것은 정치의 속성 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치가 지나치게 '경제화'되며 과정이 생략되고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도세 기준완화·공매도 한시 금지 이어 금투세 폐지 직접 공식화한 尹
"경제와 시장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증시 침체, 투자자 이탈 등 부작용을 초래할 제도는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구태의연한 부자감세 논란을 넘어 국민과 투자자, 우리 증시의 장기적인 상생을 위해 내년 도입 예정이었던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도 추진하겠습니다"(윤석열 대통령, 지난 2일 2024년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일 금투세(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추진을 직접 공식화했다. 윤 대통령이 금투세 폐지를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개인투자자는 종목당 50억 원 이상 보유 등 대주주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국내 상장주식 투자로 번 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금투세가 내년부터 시행되면 주식 등 금융투자 상품으로 5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낼 경우 20~25%의 세금을 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금투세 도입으로 2025년부터 2027년까지 추가로 얻게 될 세수는 4조 328억 원으로 추산된다.
개인투자자들은 "국내 주식시장을 살리는 결정"이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거칠게 말해 주식 시장에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들면 한국 증시에 돈이 몰릴 것이고, 그럼 개인이 갖고 있는 주식도 오를 것이란 계산이다.
이날 주식종목 토론방과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는 "금투세가 시행되면 한국 증시에서 떠나려고 했는데 정말 폐지되는지 보겠다"거나 "금투세가 폐지되면 시장의 유동자금이 한국 증시로 유입될 것"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이 잇따랐다.
한 여권 관계자는 "금투세 유예 자체가 여야 간 합의로 미룬 것이고 원래 기조는 과세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안하던 것을 지금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이 이른바 '개미투자자'를 의식한 경제 정책을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공매도 한시 금지나 주식 양도세 완화 등에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업무보고 모두발언에서 "오는 6월까지 (공매도를) 금지하고 선거가 끝나면 풀릴 것이라고 보는 부분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며 "부작용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전자 시스템이 확실히 구축될 때 푸는 것"이라고 단언하며 다시금 공매도 한시 금지 조치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불법 공매도 문제와 관련, 지난해 말에도 "이를 더 방치하는 것은 주식시장의 공정한 가격 형성을 어렵게 해 개인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힐 뿐 아니라 증권시장 신뢰 저하와 투자자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당시 금융당국이 불과 한달도 채 안돼 공매도 한시 금지로 입장을 급선회하면서 정치권의 압력이 있었다는 논란이 일었다.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대주주의 종목당 보유액 기준을 현행 10억 원에서 50억 원으로 상향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서둘러 입법예고한 것도 윤 대통령의 '자본시장 정상화'의 일환이다. 대주주 양도세가 큰 손들이 주식시장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만큼, 결과적으로는 '개미'들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점이 반영됐다.
대통령 입 거쳐 발표된 정책들…각종 논란에 금융권 일각서도 "글쎄" 우려
윤석열 정부의 의중을 거친 각종 경제 정책들과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포퓰리즘'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진행 중이다.
우선 금투세 폐지는 소득세법 개정 사안으로, 향후 국회 논의 과정에 현실화 여부가 결정된다. 실현 가능성 여부는 '미정'이란 얘기다. 결국 이번 총선이 끝나봐야 진행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지만, 일단 야당으로서는 총선을 앞두고 다수의 개인투자자들이 지지하는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쉽지 않다.
대통령이 이미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법안을 정치적 의도에 따라 폐지하겠다고 밝힌 것은 정책 신뢰도 하락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의 발표 이후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인 금투세를 부정하다니 황당무계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정의에 크게 어긋난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부자감세'라는 비판을 피하기도 어려워보인다.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2019~2021년 3년간 수익 5천만 원 이상을 거둔 투자자는 20만 명, 전체 투자자 중 0.9%에 불과하다. 또한 정부의 계획에 따라 금투세를 폐지하면 연간 1조 3천억 원 이상의 세금이 덜 걷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역대급 세수 감소 상황에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 정책이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급반전을 거듭하면 신뢰를 스스로 허무는 것"이라면서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도 한국 증시 저평가라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공매도 한시 금지 조치 역시 많은 논란을 동반했다. 전문가들은 공매도 제도 개선에는 동의하지만 한시 금지조치까지 필요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포퓰리즘 논란 역시 동반됐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김 위원장은 "개인 투자자들이 요청하는 대로 (공매도 관련 제도 개선을) 다 해드렸다"고 말했다. 공매도 담보 비율과 만기 등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기관과 외국인보다 불리하다는 지적에 김 위원장은 "국제적으로 (세 투자 주체를 동일하게) 하는 곳은 없고 현실적으로 똑같이 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그랬던 김 위원장이 한 달만에 나서 공매도 전격 금지를 발표한 것은 결국 총선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압박때문이란 지적이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전에는 대통령이 경제 정책을 발표하더라도 사전에 각 경제부처와 충분한 논의와 협의를 거치고 나서 발표를 하는 식으로 정책이 발표됐다. 하지만 지금은 각 부처도 대통령의 말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수습하고 구멍을 보완하는 것은 결국 각 부처의 몫"이라며 쓴소리를 내놨다.
전문가들 "'정치의 경제화' 경계해야"…'먹고 사는 문제'에 경제 포퓰리즘 한층 고도화
일방적으로 대중 영합주의적인 정책으로 일방적으로 국민을 호도하는 '포퓰리즘'에서 정치의 경제화, 혹은 폴리코노미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전에는 정당이 단순히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정책에 편승하는 단순한 형태였다면, 최근 들어서는 경제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과 정치가 동기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또 행정부가 선거용 민심을 '직접' 자극하는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꼽힌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주식이든 아파트 값이든 자기 개인의 이익에만 단순하게 몰두한, 또 경제라는 주제에만 심각하게 편향된 의식으로 선거정치를 활용한다. 또 정치도 이를 알고 집권 권력이 되면 마구 정책을 쏟아내게 된다. 이전의 포퓰리즘이 일방향적인 개념이라면 최근에는 쌍방향이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신의 이익을 선거를 통해 실현하는 것이지만 선거에 다양한 미래가치가 없어지고 단기적 이익만 남는 것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윤석열 정부 들어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몰입해 더 달려가며 핵심 이슈를 선거와 맞물러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국회에서 법으로 정리해야 하는 문제를 대통령이 행정권을 이용해 강행해 버린다. 행정부에 의한, 선거용 민심을 자극하기 위한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