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능력평가 16위인 상위권 종합건설업체 태영건설이 빚 부담 끝에 예상대로 28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하자 즉시 정부는 준비해 놓은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가동하겠다며 시장 충격 최소화를 위해 발 빠르게 대응했다.
분양계약자·협력업체 보호, 건설·금융시장 안정화 방안이 담긴 이 계획을 토대로 정부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상황"이라고 강조했지만, 부동산 시장 경기가 단시간에 살아나긴 어려운 만큼 사업장 구조조정 등 당분간 불안정한 국면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시장에서 나왔다.
정부 '컨틴전시플랜' 가동…"관리 가능한 상황"
정부는 이날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자 곧바로 김주현 금융위원장 주재로 관계기관 합동 회의를 열어 준비해 놓은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관련기사: '태영건설 워크아웃'에 정부 대응반 운영…"분양계약자·협력업체 보호"> 태영건설이 공사 중인 주택사업장 가운데 분양이 진행된 곳은 차질 없이 사업을 계속 진행해 계약자를 보호하고, 해당 건설사 협력업체들엔 하도급 대금 지급과 자금조달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시장 심리 위축으로 다른 건설사들까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만큼 기존에 운영해왔던 다수의 금융 지원 프로그램들을 확대 시행하며, 금융기관엔 위험 관리를 위한 추가 충당금 적립도 유도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의 골자다. 권대영 금융위 상임위원은 브리핑을 통해 총 85조 원 규모의 시장 안정 프로그램 가운데 60조 원의 여력이 남아있다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금을) 넣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정부는 "과도한 불안심리 확산만 없다면 태영건설 건이 건설산업 전반이나 금융시장의 시스템 리스크로 연결될 가능성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담에 따른 태영건설의 위기는 그간 꾸준히 거론돼 왔던 사안인데다가 정부 대책도 즉시 발표된 만큼, 시장은 다소 차분한 흐름을 보였다.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와 회사채를 포함한 채권 금리는 일제히 하락했다. 삼성증권은 보고서에서 "충격이 장기화되거나 신용 경색을 야기할 가능성은 낮다. 작년 레고랜드 사태 이후 위기 시 정책 지원이 강력해졌고, 학습 효과로 적기에 지원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시장서는 "당면 위기 넘겨도…부동산 불경기에 어려움 지속"
그러나 부동산 호황기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고물가·고금리로 급변한 환경 속에서 빚 부담에 직면한 건설사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 이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단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온다. 현장 사정을 잘 아는 한 기관 전문가는 "자금난 때문에 내년 사업계획이 아예 없다는 건설사들도 있다. 정부 지원으로 당면한 위기를 넘긴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어려움이 지속될 것"이라며 이 같이 밝혔다.한국신용평가(한신평)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올해 9월 말 기준 분석 대상 15개 건설사의 PF보증에 따른 우발채무 규모는 28조 원에 달했다. 2020년 말 16조1천억 원 대비 12조 원 가까이 늘어난 액수다. 부동산 사업 주체인 시행사가 대출을 받을 때 시공사인 건설사는 미상환을 포함한 유사시 이 빚을 떠안겠다는 등의 보증을 서 자금조달을 돕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떠안게 될 수도 있는 빚이 30조 원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한신평도 "건설사 PF보증 사업장 가운데 상대적으로 위험 수준이 높은 미착공 사업장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이라며 "PF위험이 실질적으로 축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부동산 사업장에 돈을 빌려준 금융사들을 중심으로도 경고음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이날 발표한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올해 3분기 말 금융권 부동산PF 대출 잔액은 134조3천억 원으로 2020년 92조5천억 원 대비 41조8천억 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연체율은 0.6%에서 2.4%로 크게 뛰었다.
특히 증권사의 경우 PF대출 잔액이 6조3천억 원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지만 부동산PF 채무보증 규모는 21조7천억 원에 달했다. 증권사도 PF대출 관련 보증을 서면서 자금조달을 돕고 수수료를 받아왔는데, 그 규모가 2015년(10조9천억 원) 대비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는 것이다. 한은은 "증권사의 부동산PF 관련 주요 채무보증 대상인 PF-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는 내년 중 만기 도래 금액이 20조3천억 원으로, 이 가운데 82%인 16조7천억 원의 만기가 1분기에 집중돼 있다"며 "신용등급이 낮은 PF-ABCP는 높은 신용 경계감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불경기에 건설사 부도 위기 이어질 것…구조조정 불가피"
한은은 이 보고서에 "부동산 경기의 회복 여부와 그 정도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임을 감안해 부동산PF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사업성을 재평가 해 지원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대주단들이 자율적인 협약을 통해 사업 지속 또는 구조조정 여부를 신속하게 결정하도록 지원함으로써 부실 PF사업장의 질서있는 정리를 유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건설업 관련 구조조정 국면이 고통스럽겠지만 불가피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금융 지원을 통한 위기 이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통화에서 "채무 유예 등 지원 방식은 근본적 대책이 되기 어렵다. 부동산 경기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면서 건설 시장이 활성화 된다면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단기간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 위원은 "내년에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금리 인하가 단행된다고 하더라도 건설 경기 회복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 위기에 몰리게 되는 건설사들도 추가적으로 더 나올 가능성이 높다"며 "결국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지난 4월 PF 대주단 협의체를 출범시켜 대출 만기 연장 등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노력해왔던 당국도 부실 사업장을 질서 있게 정리해 나가야 한다는 쪽에 무게를 싣는 기류다. 이날 정부 발표에도 "정상 사업장에 대한 원활한 금융 공급, 부실·부실 우려 사업장의 정상화·재구조화 지원을 통한 부동산 PF의 연착륙 기조를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