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박정희가 감행한 민족 백정행위를 훨씬 능가하였다. 전○○ 역도는 광주 땅을 피바다에 잠근 대학살 만행을 진두지휘…"(남북대화사료집 제10권 32쪽)
12.12 군사반란과 '서울의 봄'을 전후한 시기를 정리한 남북대화사료집이 당시 북한 발표문과 보도문 등 북한의 비난반응을 게재하면서 '전두환' 대신 '전○○' 표기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을 모두 비난한 북한 반응을 게재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실명 표기와 달리 전두환 대통령만 '전○○'으로 수정 표기한 셈이다.
통일부가 28일 공개한 남북대화사료집 제10권을 보면 '전○○' 표기는 모두 154회 쓰인 것으로 검색됐다. 북한이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한 대목은 모두 '전○○'로 표기하는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북대화사료집 제9권에는 '전두환' 실명이 1회 검색되는데, 1980년 11월 11일 북한이 '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 때는 유일하게 '전두환 군사파쑈독재'라는 실명 표현이 게재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의 봄 다음 해인 1981년 1월 12일 국정연설 등을 통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하며, "본인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아무런 부담과 조건 없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초청"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거부성명과 각종 보도문 등을 통해 전 대통령에 대한 극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여기에는 전 대통령 이름 뒤에 '역도' '역적' '괴뢰'는 물론 '살인 괴수' '살인광' '인간 백정' 등과 같은 극언이 따라붙기 일쑤였다.
반면 '전두환 대통령' 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로 표기한 우리 측의 성명과 제의, 보도문 등의 문서는 사료집에 그대로 게재됐다.
북한이 비난한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전○○'의 표기와 달리 실명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게재한 것과도 비교된다.
당시 '전○○'으로 대통령 이름을 피해 사료를 편찬한데는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권력행사와 억압적 사회 분위기도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극단적인 비난을 담은 표현을 그대로 수록하기는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남북대화사료집 9권과 10권은 전두환 정권의 중반기인 1984년에 정리·편찬됐다. 당시 실무인력은 시기별로 분야별로 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