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4월 총선 전까지 사실상 전기‧가스요금을 동결하면서, 한국전력이 발전자회사들에게 중간배당을 요구하는 과정 중 배임 논란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정치권이 개입해 '요금 현실화'라는 정공법을 회피하면서, 역마진 구조 방치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4일 한전과 가스공사 등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1분기 에너지 공공요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지난 달부터 이미 에너지 공공요금 동결 신호를 보낸 게 맞다"며 "2024년 1분기 대상 요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전은 지난 21일 1분기 적용 대상 연료비조정단가를 킬로와트시(㎾h)당 5원으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올해 4분기와 동일하게 단가를 유지한 것으로, 사실상 전기요금 동결로 해석됐다. 겨울철에 급격히 증가하는 난방 수요를 고려해 가스요금도 동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문제는 전기와 가스 등 주요 에너지 요금 관련 '역마진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정부가 전기‧가스의 소매요금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석유와 LNG(액화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의 등락이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글로벌 에너지 위기로 인해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국면에서도 전기‧가스요금을 소폭 인상 또는 동결한 탓에 한전과 가스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들의 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상황이다.
대부분 공기업들이 일정 부채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한전은 총부채만 200조를 초과하는 등 존립 위협을 받고 있는 수준이다.
지난 2021년부터 지속적인 적자를 기록한 한전은 올 3분기에는 1조9966억원가량 깜짝 흑자를 냈다. 하지만 올해 1~3분기까지 누적 손익은 6조4534억원 적자였다. 2021년 5조8000억원 적자와 함께 지난해에는 32조60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했다.
최근 국제유가가 재차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올해 4분기에는 1조원 안팎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된다. 누적 적자만 45조원에 달하는 한전은 향후 5년 간 약 20조원 규모의 재무개선 방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현 시점에서도 적자 폭이 늘고 있어 '원자재 원가 등락'을 반영한 요금 현실화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지난달 8일 정부는 4분기 적용 대상 전기요금을 산업용만 kWh당 10.6원 인상하는 데 그쳤다. 비율로는 6.9%였다. 올해 초 산업부는 2023년 안에 전기요금을 kWh당 51.6원 인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2분기에 각각 13.1원, 8.0원 등 인상 이후 3분기는 동결했다. 남은 인상액은 30.5원이었지만, 산업용 전기요금만 소폭 올린 셈이다.
당초 정부가 제시한 인상 폭 관련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여론 악화를 의식한 결과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역마진 구조 지속으로 인해 한전이 벼랑 끝에 몰리면서, 중간배당 추진 등 다소 무리한 조치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전은 연말까지 한국수력원자력을 포함한 발전자회사 6개, 한전KDN으로부터 약 3조2천억원에 달하는 중간배당을 최종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처음엔 4조원을 요구했지만, 적자에 허덕이는 자회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3조5천억원으로 하향 조정한 이후 재차 더 낮춘 것이다.
한전이 이례적으로 중간배당을 요구한 것은 한전채 발행 한도 때문이다. 현재 한전채는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5배까지 발행할 수 있는데, 올해 적자를 반영하면 '자본금과 적립금'이 감소하면서 내년엔 채권 발행을 아예 못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전의 올해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는 약 20조9천억원인데, 여기에 올해 손실 전망치인 6조원을 반영하면 합계가 약 14조9천억원으로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발행 한도는 74조5천억원으로 줄어든다. 이미 한전채 잔액이 약 79조6천억원에 달하고 있어, 현 상태로 두면 한도를 초과한 채권 5조원가량을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기요금을 동결하기로 결정한 이상, 중간배당을 받아 적자 폭을 줄이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한전과 마찬가지로 재무 상황이 좋지 않은 자회사들 역시 선뜻 중간배당에 동의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한 발전사 관계자는 "발전사들 역시 적자 상황에서 이익을 모회사에 주게 되면 향후 배임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발전자회사들은 일단 오는 29일까지 이사회를 열고 정관 개정에 이어 중간배당 관련 의결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전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중간배당을 하더라도, 근본 대책은 '원가주의'를 요금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당장 한전에는 중간배당이 이익이 되지만, 전체적 관점에 따져봐야 한다"며 "무리하게 배당을 요구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했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시장에 맡겨두면 에너지 원자재 원가와 함께 요금도 등락하는데, 정치권이 깊게 개입하면서 가격 왜곡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