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기간 폭발적으로 성장한 디지털 콘텐츠 중 하나였던 웹툰의 인기가 올해 들어 주춤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만화 왕국인 미국·일본과 아세안 회원국이 포함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성장세가 지속되면서 국내 웹툰업계 해외 진출은 내년에 더 가속화 할 전망이다.
다만 국내 메이저 플랫폼인 네이버·카카오가 시장 선점을 강화하면서 중소 플랫폼의 직접 해외 진출은 쉽지 않아 보인다. 업계 전문가들은 학원액션·무협물이나 성인만화 등 편중된 장르에서 벗어나 스토리라인이 풍부한 다양한 장르를 개발해야 1차 소비되는 데 머무르지 않고 2차, 3차 창작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내 성장 주춤, 글로벌은 성장세…장르 편중에 '피로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웹툰 이용자의 '주 1회 이상' 이용 비율은 2021년 66.9%에서 2022년 69%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올해 62.8%로 크게 줄었다. 특히 20대(-7.2%)와 40대(-8.5%), 50대(-8.9%)에서 이용 비율 감소폭이 컸다.
거의 매일 웹툰을 본다고 답한 충성 독자 역시 지난해 24.7%에서 올해 20.4%까지 줄었다. 보고서는 엔데믹 이후 외부 활동이 늘어나며 디지털 콘텐츠 이용률 증가세가 감소한 것으로 분석했다. 인기 장르에 편중되는 스토리라인과 웹툰 제작 스튜디오들이 유사한 작품을 양산한 탓에 불거진 다양성 부재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용자들은 개별 인기 작품을 기억하기보다 판타지, 학원물, 좀비물 등 장르로 기억하는 경향이 늘었다. 인기 위주의 비슷한 작품이 양산되면서 피로감이 가중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추세는 웹툰 유료 구독에도 영향을 줬다.
웹툰 유료 결재 경험 비율은 올해 45.6%로 작년(45.7%) 대비 소폭 줄었다. 유료 결제 빈도 역시 '주 1회 이상'이라는 답변은 올해 14%로 작년(14.3%)보다 줄었다. '주 3~4회'라는 답변은 작년 5.1%에서 올해 3.8%로 크게 감소했다. 대신 '2~3개월에 한 번' '4개월~1년에 한 번'이라는 응답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해외 시장에서는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만화왕국 일본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 시장 확대를 강화하고 있다.
네이버웹툰은 일본 계열사인 라인 디지털 프론티어 산하 라인망가와 이북재팬이 올 1~11월 거래액 합산 결과 1천억엔(약 8800억원)을 넘겼다고 밝혔다. 2021년 800억엔에서 2022년 900억엔으로 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중이다.
일본 만화·웹툰 앱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카카오픽코마는 일본에서만 지난해 884억엔의 거래액을 기록했다. 올 1~3분기 누적 거래액은 757억엔(약 6900억원)을 넘기며 전년도 실적을 뛰어넘을 전망이다.
북미 시장에서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모바일 데이터 분석업체 센서타워가 발표한 '2023년 전 세계 만화 앱 시장 인사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올 1~10월 누적 인앱 구매수익에서 네이버웹툰이 2억달러(약 2600억원), 카카오의 타파스가 1억달러(약 1300억원)를 기록하며 북미 시장을 석권했다.
올해 전 세계 만화 앱 시장 추정 수익은 무려 28억 달러(인앱 결제 기준·약 3조6천억원)다. 2030년 글로벌 전체 웹툰 시장 규모는 500억 달러(약 6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무빙' '운수 오진 날' 영상화 성공사례…스토리 IP 확보 강화
최근 네이버, 카카오를 비롯해 국내 중소 플랫폼들은 웹툰 스토리라인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웹소설을 활용하는 노블코믹스 IP(지식재산권)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소설-웹툰-영상-공연-음악으로 연결되는 IP의 장르 확장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같은 시도는 학원액션·무협물 등에 기운 양산형 장르 편중에서 벗어나 영상화, 음악, 굿즈 등 시장성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웹툰·웹소설 플랫폼 업계 한 관계자는 "웹툰보다 더 일찍 정착한 장르가 웹소설이지만 2·3차 창작물로의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다"며 "이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웹툰을 결합시킨 노블코믹스가 최근 주목받으면서 웹툰, 게임,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드라마화 되며 큰 인기를 끈 '운수 오진 날'의 동명 원작 웹툰을 그린 아포리아 작가는 "만화를 그릴수록 작화보다 중요한 것이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앞으로는 노련한 스토리 구성 능력이 반영된 작품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웹툰 작가들과 협업해 노블코믹스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웹툰 스튜디오 '그린기린'을 최근 설립한 웹툰 '말박왕'의 용사 작가도 "작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잘하면 좋겠지만 독자들에게 소구력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미 검증된 스토리를 각색해 만화나 영상화를 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며 "작품의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텔링'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 1회 연재 마감 압박 때문에 완결성이 부족해지는 원인을 낳기도 한다. 업계에선 소설, 출판, 웹툰, 영상, 게임, 공연, 음악, 캐릭터(굿즈) 등의 미디어 믹스에 주목한다. 해외 시장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주요 플랫폼을 중심으로 노블코믹스의 수요도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시장은 물론 넓은 해외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확장성을 가진 작품들이 많이 나와줘야 한다"며 "화려한 작화뿐 아니라 탄탄한 스토리가 뒷받침되는 작품들이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끌했던 올해 만화계…생성형 AI 논란, 선택의 문제?
만화계에서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이용하는 양산형 웹툰 제작을 두고 올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프롬프트에 원하는 그림체와 표현 등을 상세하게 입력하면 자동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생성형 AI는 경쟁이 치열한 웹툰 시장으로 급속히 유입되며 주목받았다.
마감 압박과 창의적인 스토리 결핍에 시달리는 창작자들의 일부 기대와 달리 독자들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지난 5월 네이버웹툰에 연재한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이 생성형 AI를 활용한 것처럼 일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논란이 커지자 제작 업체 측은 "마무리 보정 단계에서 AI를 일부 활용한 것일 뿐 창작의 영역은 직접 작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네이버와 카카오는 AI 관련 규정을 마련하고 AI를 활용한 작화를 배제하기로 했다.
이후 웹툰 작화 영역에서는 AI 활용이 상당부분 통제되고 있다. 하지만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 구성에 필요한 분야에서는 생성형 AI 활용이 더 늘어나는 추세다.
네이버웹툰에 연재하고 있는 한 작가는 "스토리 창작 부문에서는 이미 생성형 AI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며 "앞으로 AI가 웹툰 제작의 여러 공정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기술의 흐름을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노동 시간 문제 해결과 더불어 거부감을 얼마나 해소할 것인가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작가는 "마감과 매회 스토리 전개에 시달리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입장에서는 AI의 등장을 반기는 모양새다. 반면 여전히 모든 공정에 개인의 창작을 시도하는 노력도 많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의 문제라기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개별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개인 작가보다 웹툰 스튜디오 등 제작사를 중심으로 AI 활용에 대한 유혹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일부 중소 플랫폼이나 해외 마이너 플랫폼에서 AI 웹툰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저작권 의식이나 창작성이 희박한 중화권과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이미 생성형 AI 웹툰이 유통되고 있다"며 "일부 동남아권에 진출한 웹툰 제작 업체들이 AI를 활용한 웹툰 제작을 광범위하게 하고 있는 사례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분간 국내에서는 웹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이른바 '작화 도덕성 검증'을 지속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