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가장 큰 무기는 언어"(타블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에픽하이는 잘 벼려진 언어로 세상에 여러 이야기를 던졌다. 근거 없이 뜬소문을 만들거나 누군가를 헐뜯는 헤이터(hater)들을 여유롭게 반박하면서도, 그 미움 때문에 힘들었다고 인정하는 솔직함이 있다. 날카로운 세태 비판도,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사랑 이야기도, 에픽하이는 자신들의 '언어'로 소화했다.
'들어주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려고 애써온 시간이 올해로 20년. 에픽하이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에서 20주년 콘서트를 열어 관객을 만났다.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전석 매진돼 나중에 추가된 금요일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 전체 실황을 촬영하기에 관객 초상이 담길 수 있는데, 20주년 공연의 감동을 영원히 남기기 위함이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여러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시면 공연이 시작됩니다"라는 문구 후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암전됐다.
공연 전반부에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은 곡 비중이 높았다. 에픽하이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인 '플라이'(Fly) 무대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점프하며 무대를 즐겼다. 화면에 후렴구 가사를 띄워 자연스럽게 떼창 구간이 됐다. 재치 있는 가사가 인상적인 밝은 분위기의 '평화의 날'과 흡사 EDM 리믹스 파티를 연상케 한 '하이 테크놀로지'(High Technology)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초반부터 달려도 되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기도 했다.
'최고의 슈퍼스타' 투컷, '디 오피셜 막내'이자 '디 오피셜 사랑꾼'인 미쓰라, '힙합계의 이단아'이자 '하루 아빠'인 타블로는 '하이 테크놀로지' 무대 이후에야 시간을 갖고 숨을 골랐다. "아이돌처럼 인사할까?"라고 운을 띄운 타블로를 필두로 미쓰라, 투컷까지 멤버 전원은 "언제나 하이(high)! 에픽하이"라고 인사했다. 타블로는 "저희가 예측하지 못한 노래로 시작해서 한번 놀라고, 시작하자마자 '하이 테크놀로지'를 한다고? 해서 놀랄 것 같다"라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라고 해 환호를 받았다.
타블로와 미쓰라는 무대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관객 취향을 나름대로 분석한 후 거기에 맞는 노래를 선사했다. 옛날로 따지면 '싸이월드'를 하는 사람들, 즉 '싸이월더'들에게는 아이유가 피처링한 '연애소설'을 들려줬다. '한류' 느낌에 '패션 위크' 분위기라는 쪽을 위해서는 그룹 세븐틴(SEVENTEEN)의 호시가 피처링한 '스크린 타임'(Screen Time)을 전했다.
무대에서 사라진 에픽하이 대신,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가 첫 손님으로 등장했다. 다이나믹 듀오는 '고백'(Go Back) '죽일 놈'(Guilty) '불꽃놀이'(Fireworks) 등 히트곡 무대를 연달아 해 호응을 끌어냈다. 워낙 히트곡들이긴 했지만, 이곳이 다이나믹 듀오의 공연장이라 해도 무리 없을 만큼, 관객들은 능숙한 떼창으로 화답했다.
에픽하이 콘서트에는 매회 게스트 두 팀이 출연했다. 첫날 다이나믹 듀오 다음 주자는 하동균이었다. 그는 에픽하이 앨범에 실린 참여곡 '해피 버스데이 투 미'(Happy Birthday To Me)에 이어 본인의 대표곡 '그녀를 사랑해줘요'와 올해 10월 발매한 신곡 '이 밤 나의 마음'을 열창했다.
다이나믹 듀오와 하동균 모두 오랜 시간 친분을 나눈 사이여서 그런지, 편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안겼다. 다이나믹 듀오를 보고 남성 관객이 "사랑해요!"라고 외치자, 개코는 "항상 남자분들이 사랑한다고 하신다. 역시 저희 공연과 함성의 질이 좀 다르다. 에픽하이 공연엔 이렇게 여성분들 소리가 많은데, 저희 공연장에선 좀 다르다. '형~' 한다"라고 말했다.
"오늘 정식이(투컷의 본명) 왔어요?"라고 짓궂게 물은 하동균은 과거 음악방송에 나가던 시절에는 투컷의 디제잉 장비가 꺼져 있었다는 일화를 전한 후 "오늘의 장비는 켜져 있다"라고 해 웃음을 유발했다. 투컷의 춤을 두고는 "1년만 더 지나도 이제 못할 것"이라며 "정식이를 사랑해 달라"고 재차 당부해 관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에픽하이는 쉽고 일상적인 가사는 물론, 서정적이고 철학적이면서 솔직한 가사의 곡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번 20주년 콘서트에서 에픽하이가 들려준 노래엔, 멈추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수많은 이를 '청자'로 만들어낸 에픽하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분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타블로의 말처럼, 에픽하이는 공들이고, 애써서 한 줄 한 줄을 썼다.
'고'(Go) 가사에는 "삶으로부터 맘으로" 나온 이야기를 "가까이 다가가 들으며"(listen close) 끝내 "피와 땀으로" 플로우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겨우 가사 한 줄 적는데 며칠 밤"을 새우고, "갈수록 하고 싶은 말과 해도 되는 말이 줄고 기대와 무거운 책임감만" 따른다고 고백하는 '블리드'(BLEED)에서는 '화자'이면서 '창작자'인 위치의 부담감을 실감할 수 있다.
'노땡큐'에서는 염려를 가장한 힐난을 늘어놓는 이들에게 "오지랖 떨지 말고 신경 꺼"라며 "내 걱정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동료 래퍼들과 함께한 '본 헤이터'(Born Hater)에서 타블로는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타진요'를 직접 언급하면서도 자기를 "무한대를 그려주려 쓰러진 팔자"로 비유하며 "너의 그 무익한 열등감 나랑 무수히 붙어봤자 니 손해"라고 일갈한다.
팀의 성공 이후 원치 않는 오해와 억측에 시달리기도 했던 에픽하이는 '돈 헤이트 미'(Don't Hate Me)에선 "온 세상이 안티"지만 "난 너만 손뼉 치면" "내 편이면" 된다고 노래한다. 명백한 고통과 상처를 없던 일인 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응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세상이 비록 "이상한 애 외톨이 약자 왕따 이단아"라고 규정한다 해도, "네가 못난 게" 아니고 "우린 틀린 게 아냐"라며 "달라도 돼 미쳐도 돼"라고 용기를 주는 '뉴 뷰티풀'(New Beautiful)은 시선을 '우리'로 옮겨 각자를 존중하고 감싸 안는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곱씹고 싶은 가사를 '감상'하기에, 이번 공연은 최적이었다. 귀에 와서 꽂히는 듯한 정확한 발음과 전달력, 곡 분위기에 맞는 감정 조절 등 모든 면에서 에픽하이는 베테랑이었다. 타블로와 미쓰라의 랩과 보컬은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 매번 관객에게 잘 도착했고, 투컷은 디제잉은 물론이고 예상보다 더 춤을 좋아하고 즐겼다. 특히 외화 '바비' 중 켄(라이언 고슬링)의 '아임 저스트 켄'(I'm Just Ken)을 패러디한 '아임 저스트 컷'(I'm Just Kut) 영상에서 능청스러운 연기력과 퍼포먼스는 발군이었다.
미쓰라는 "한 해 한 해 진짜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현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아무래도 좀 그런 것들이 부족했던 것 같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저희 20주년을 축하해주신 여러분,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이 에픽하이를 만들었다. 여러분을 위해 앞으로도 더 노력하는 그런 팀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타블로는 "참 신기한 게, 우리가 한 거라고는 같이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고 뛴 것밖에 없는데 잠시나마 다 잊혀지지 않았나. 그 힘은 저희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린 게 아니라 여기 와주신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린 시절 한 번 사는 인생 열심히 아낌없이 노력하며 살고, 과연 나는 어떤 이름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딴 거 다 필요 없고 오늘 여러분을 보니까 에픽하이 그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타블로)